일본 제국주의의 멸망 과정과 히틀러의 제3제국이 몰락하는 역사적 순간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원폭투하후 일제는 미군과의 막후협상을 통해 천황제를 비롯, 집권층의 권력기반을 지켜낸데다 발빠른 항복으로 일본 열도가 전쟁터로 황폐화되는 참화를 막아냈다.

그러나 히틀러제국은 마치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카르타고를 연상케하듯 베를린 전체가 초토화된다. 승리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에서 히틀러는 독일 민족 전체의 몰락까지 감수하겠다며 스스로 ‘위대한 몰락’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려 시도했다는 게 히틀러와 제3제국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1945년 4월16일 20개 대군단 250만 소련 군대가 베를린 공격을 시작한 순간부터 히틀러가 지하10m 아래 벙커속에서 권총 자살하는 30일까지 14일 동안의 생생한 기록이다. 음산한 지하벙커에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며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 춤을 추는 독일 장교들. ‘배신의 정신적 착란’이 몰아치며 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을 탐하는 히틀러 주변의 인간 군상. 특히 자신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힌 충복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의 배신에 착란증세를 보이는 히틀러의 모습 등이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된다.

지난해 9월 이책의 원제인 ‘몰락(Der Untergang)’이라는 타이틀로 영화화돼 독일에서만 450만명의 관객을 모으는 등 큰 논란을 일으킨 이책의 핵심은 역시 히틀러라는 한 개인에 집중된다. 이 전쟁의 마지막 몇주동안 매일 평균 수만명의 희생자가 나온다.

히틀러는 도이치(독일) 민족의 몰락 의지를 너무나 선명히 드러낸다. “전쟁에 패배한다면 민족도 패배한 것이다. 도이치민족이 극히 원시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토양을 배려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민족은 허약한 것으로 판정났고 모든 미래는 더욱 강한 동부 민족에만 속하는 것이다. 이 싸움 이후에 남는 것은 어차피 열등한 사람들뿐이다.”

저자는 마지막까지 히틀러를 버티게 한 힘은 이러한 몰락 의지였다고 결론내린다.

히틀러의 마지막 장면을 주도한 인물들, 카이텔, 요들, 크렙스와 같은 히틀러를 끝까지 수행한 장교들은 무의미한 전투를 계속하자고 절망적으로 히틀러를 설득하고,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 고위장교 중 누구도 백기를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자는 다윈주의적 가치관, 즉 강자의 권리라는 문명 이전의 원칙만이 히틀러가 세운 세계관일 뿐, 히틀러는 그 어떤 문명적인 이념도 갖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어떤 권력자도 문명의 사유를 벗어나 이렇게 멀리 원시로 되돌아간 적은 없었다.”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는’ 독특한 권력 현상인 히틀러에 대한 저자의 최종 결론이다. 안인희 옮김. 정충신기자 cs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