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은 우리 배우로는 드물게도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두차례나 밟았다. 조선후기 천재화가 장승업으로 나온 ‘취화선’과 15년간 이유없이 감금된 남자로 나온 ‘올드보이’. 칸에서 선전한 이 두 영화가 그의 대표작으로 흔히 거론되지만 배우 최민식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작품으로는 뭔가 부족한 듯하다. 최민식하면 떠오르는 텁텁한 된장 느낌, 교보생명CF에서 상심한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거치른 들판을 달려가자”고 위로를 건네는 오래된 친구 느낌,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씩 웃다가도 그 끝에 눈물이 배어나올 듯한 느낌은 오히려 조선족 처녀와 계약결혼한 삼류건달로 나온 ‘파이란’, 탄광촌 음악교사로 부임하는 실패한 트럼펫주자로 나온 ‘꽃피는 봄이 오면’, 길거리 매맞는 복서로 나온 ‘주먹이 운다’의 이미지에 가깝다.

최민식은 회한이 있는 남자, 페이소스가 있는 남자의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다. 그와 함께 충무로 빅3로 꼽히는 설경구, 송강호와 비교해 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가령 설경구가 사회적 억압과 좌절을 자기 몸을 갈아부수는 듯한 투혼으로 표출해내는 ‘분노’의 배우라면(설경구의 분노 대상은 80년대 억압적 사회(‘박하사탕’),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오아시스’), 국민을 도구화한 부도덕한 정권(‘실미도’), 타락한 자본가와 그의 비호세력들(‘공공의 적2’) 등 사회적인 것이다), 최민식은 상대에게 적대감과 분노를 퍼붓기보다 자기안으로 파고들거나 굳건한 벽에 하릴없이 제 몸을 부닥치며 슬퍼하는 배우다. 또 최민식이 연기하는 슬픔과 좌절, 분노는 설경구의 그것처럼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도저히 일류가 될 수 없는 주변부의 남자로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존재의 슬픔같은 것 말이다(반면에 송강호는 그런 좌절을 회한이 깃든 엇박자의 코믹한 웃음으로 풀어낸다).

강하지만 매서울 것 없는 눈매, 삶의 훈장같은 꺼칠한 주름이 팬 얼굴, 비음섞인 투박한 목소리는 최민식에게서 매끈한 엘리트의 이미지나 고뇌하는 지식인적 분위기를 걷어낸다. 이처럼 주류로 매끈하게 편입되기에는 어쩐지 불편하고 어색한, 우직한 실패자의 애환을 담아내는 그의 이미지는 90년 그의 TV데뷔작인 ‘야망의 세월’(KBS)에서의 건달 꾸숑, ‘서울의 달’(MBC)에서의 순박한 시골청년 춘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4월1일 개봉하는 ‘주먹이 운다’에서 최민식은 또 한번 슬픈 실패자를 연기한다. 이번엔 길거리 매맞는 복서로 전락하고 가족에게도 외면받은 슬픈 아버지 역이다. 최민식은 여기서 한국적 아버지 최불암, 희화화된 시트콤속 아버지들, 아버지를 대신해 희생하는 장자들(‘태극기 휘날리며’‘우리형’)을 잇는 새로운 아버지를 보여준다. 그 새로운 아버지는 여전히 무능한 실패자이고 특별히 거룩한 희생자도 아니지만, 못난대로 살아보려 발버둥치고 나름의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해서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아버지다.

‘주먹이 운다’와 최민식은 그런 점에서 최근 충무로를 꾸준히 지배하고 있는 가족영화의 의미있는 진화를 보여준다. 가령 가족해체, 가족주의 타파에 힘이 실린 영화들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조건적인 가족주의 복원을 강조한 영화들을 지나, 이제 가족영화는 가족내 역할에 갇히지 않은 채 가족 성원들을 인간 자체로 받아들이며 이해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영화들이 500만 관객돌파에 성공한 ‘말아톤’이며 ‘인어공주’, ‘주먹이 운다’이고, 여기서는 단순한 최루성 가족신화가 아니라 가족간 소통, 존재들의 관계가 중요한 모티브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주먹이 운다’에서 최민식이 보여준 아버지는 미워도 싫어도 아버지, 잘나도 못나도 아버지, 육친이전에 가엽고 측은해서 연민할 수밖에 없는 한 남자로서의 아버지다. 그런 슬픈 아버지를 연기하기에 최민식만한 배우가 없다. 그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연민”이라고 했던 것이 문득 떠오른다.

양성희기자 cool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