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일이 있고, 안할 일이 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비록 어떤 불이익이 있다 해도 내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 사업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 걱정해서 내가 맡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졸장부로 끝난다. 남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 자리는 명실공히 재계를 대표하는 자리였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회장, 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구자경 LG명예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 등 재계의 큰 별들이 역대 전경련 회장을 거쳐간 것만 봐도 자리의 무게를 짐작케한다.

최종현(전 SK그룹회장)은 1993년 2월 유창순(19~20대 전경련회장)의 뒤를 이어 21대 전경련 회장에 올라 내리 3연임했다. 그는 전경련 회장이라는 자리를 명예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경제 전체를 걱정하고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직책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것저것 눈치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주저없이 밝히고 주장했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때로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발언도 마다않는 그의 이런 성격이 정부의 입맛에 맞을리가 없었다.

최종현이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1993년 2월 새롭게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신경제’를 기치로 내걸고 ‘재벌 길들이기’에 나섰다. 그러나 최종현은 철저한 시장주의자였다. 그는 시장의 자율성을 해치는 정부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전경련 회장에 선출되기 직전에 그가 ‘경제계가 바라는 새 정부의 국가경영’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작은 정부’와 ‘자유경제체제의 확립’을 강조한 것도 이같은 그의 소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전경련 회장 취임과 함께 최종현은 정부를 향해 의견을 거침 없이 쏟아냈다. 1993년 4월 전경련은 “정부의 ‘신경제 5개년 계획’이 제7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과의 관계가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 창달에 대한 의지가 결여돼 있다”고 지적하고, 문제점과 부문별 보완과제를 정부에 제시했다. 이어 5월 초에는 경제5단체 명의로 다시 대기업에 대한 여신규제 완화 등을 요구하는 이른바 ‘신경제 건의안’을 제출한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하나같이 귀에 거슬리는 말만 골라서 하는 듯했다.

정치와 경제간에 서열이 분명했던 당시로선 너무 앞서간 발언이었다. 특히 갓 출범해 기세가 등등해 있던 김영삼 정권 입장에선 기가찰 노릇이었다. 벌벌 떨어도 시원찮을 판에 목을 뻣뻣이 세우고 이런저런 요구를 쏟아내는 최종현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정부는 1993년 5월8일 예정된 경제장관과 경제5단체장과의 회동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데 이어 5월17일 ‘신경제 100일 계획 중간점검회의’에 최종현을 배제했다. 경제를 논한다면서 전경련 회장을 아예 빼버린 것이다. 일종의 경고였다. 그러나 최종현은 재계의 대변자로서의 소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1993년 8월2일 금융실명제가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전격 실시되자, 전경련은 이에 따른 기업의 애로사항과 금융실명제 조기 정착을 위한 보완과제 등을 담은 정책대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조규하 당시 전경련 부회장은 “학자들과 토론을 즐겼던 최 회장은 금리문제, 산업구조 고도화,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 등의 현안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완벽한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며 “합리적이고 근거가 없는 주장은 절대로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1994년 봄 청와대에서 열린 ‘신경제 추진회의’에서 있었던 일화는 최종현과 당시 정부 사이에 깔려있었던 불편한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30분 전에 도착하는 게 ‘불문율’로 여겨졌지만 이날 최종현은 5분 전에야 회의장에 나타났다. 대통령이 연설문을 읽고 있을 때 메모에 열중하는 다른 참석자들과는 달리 최종현은 미리 배부된 유인물을 접어서 부채질을 했다. 유난히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서 무의식 중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권력 입장에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만불손한’ 행동으로 비쳤다.

회의는 무사히 끝났지만 이후 ‘건방지다’ ‘방자하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급기야 청와대 한 비서관은 당시 손길승 경영기획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최종현은 전경련 회장으로 있는 동안 청와대 행사에 참석하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대통령과 기업인의 허심탄회한 토론을 기대했지만 청와대 회의는 대통령의 연설과 기업인들의 메모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시효과를 위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를 소비하는 것이 실용주의자인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1995년 2월14일 최종현은 전경련 회장에 재선임된다. 정부가 소유분산을 통한 경제력 집중 억제와 문어발 경영의 관제탑인 기획조정실 해체 등이 포함된 경제개혁안을 발표한 직후였다.

재선임 기자회견에서 최종현은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는 “문어발이니 업종 전문화니 하는 것들은 에디슨이 전구 만들 때나 하는 얘기”라며 “지금은 국경없는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세계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경제안정책과 고금리·고비용 구조, 과도한 행정규제, 공기업 민영화 등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비판했다.

“업종 전문화와 소유 분산이 쟁점이었습니다. 최종현 회장은 이에 대해 정치가 직접 간여할 사항이 아니고, 정부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드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 회장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라고 할 수 있죠.”

전경련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권오용 현 SK그룹 전무는 “최 회장의 비판은 정부에 대한 비난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평소 고깝게 보아오던 최종현이 위험수위를 확실하게 넘어선 것으로 간주했다.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가능한 제재수단이 다 동원된 ‘융단폭격’ 수준이었다. 기자회견 이틀후 국세청은 SK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고, 사흘 뒤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당 내부거래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정부의 조치는 대다수 언론에 부당한 탄압으로 비쳤다. 한 신문의 사설은 당시 여론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무리 정부가 조사착수의 타당성과 불가피성을 설명해도 ‘오이밭에서 갓끈을 매었다’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만에 하나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이 빌미가 돼 이른바 ‘괘씸죄’로 조사에 착수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SK그룹을 겨냥한 정부의 칼날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주변에서 “사과해야한다”는 진언이 빗발쳤다. 최종현은 그때마다 “내가 틀린 말 했느냐”며 일축했다. 하지만 소신을 고수하기에는 정부의 압박이 너무 거셌다. 결국 최종현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발언을 뒤집는 사과 회견을 해야했다.

“기자회견을 앞두고 회장 방에 들어갔는데, 그때 본 최종현 회장의 눈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살벌했습니다. 최회장 입장에서 보면 사과발언이 아마 죽기보다 하기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이노종 SK아카데미 원장)

국세청과 공정위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그 해 4월13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터진 이건희 삼성회장의 폭탄발언이 정부와 재계의 긴장관계에 불을 질렀다. 이 회장은 국내 언론사 특파원과의 오찬을 겸한 기자간담회에서 “행정규제와 권위의식이 사라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은 일류국가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게 된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이회장이 최회장을 엄호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회장 역시 이 발언이 문제가 돼 한동안 귀국하지 못하고 정부에 사과를 해야했다.

정부와 갈등은 빚었지만 최종현은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2002한·일월드컵 공동개최도 따지고 보면 최종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최종현은 1995년 4월 전경련 국제담당 상무를 일본 게이단롄(經團連)에 극비리에 파견해 일본 재계와 월드컵 공동 개최를 협의토록 지시했다.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유치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최종현은 공동 개최를 통해 양국의 ‘반목’을 ‘협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게이단롄 회장을 맡고 있던 도요타 쇼이치로 회장도 최종현의 생각에 동의했고, 월드컵 공동 개최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해 결국 결실을 맺게 된다.

1997년 2월 세번째로 전경련 회장에 추대된 최종현은 차기 전경련 회장을 1년 전에 미리 선임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부회장단 중에 한 사람을 차기 회장으로 내정해 두고, 준비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다.

정치권의 입김에 재계 수장(首長)인 전경련 회장 자리가 왔다갔다 해서는 안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일본 게이단롄은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98년 2월 열린 정기총회에서는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