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벌레’ 손길승과 40년 동고동락

“저는 40여년을 SK와 같이 살아왔습니다. SK의 빛과 그늘을 함께 받아 왔습니다. 그동안 SK는 직물공장의 중소기업에서 정유와 정보통신분야에서 세계적인 위치에 있는 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저는 선대 회장님들 옆에서 열과 성의를 다해서 한없이 일했습니다. 한국의 경제가 빠른 시간 내에 성장할수 있었던 이유는 왕성한 기업가 정신과 그룹이라는 독특한 경영법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모태 기업은 부실이 쌓여 왔습니다. 사회는 개별 기업에 문제를 묻지 않고 그룹 전체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부실을 막기 위해 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단의 조치를 취하면서 모든 책임이 저에게 오도록 조치 했습니다. 제가 후배들에게 항상 가르쳤던 것처럼 권한 이임은 가능하나 책임은 이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 6월1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 공판에서 손길승(전 SK그룹 회장)은 20분에 걸쳐 최후 진술을 낭독했다. 여기에는 한국 기업 성장사의 굴곡과 이에 얽힌 그의 회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8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손길승은 법인세 포탈과 불법 정치자금 제공 등으로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대졸 평사원으로 입사해 5대 그룹 총수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 손길승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재계인물현대사 ‘최종현 편’은 이번에 손길승을 다룬다. 이유는 그가 최종현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손길승은 최종현과 함께 SK그룹을 일궜으며, 최종현이 별세하자 그를 대신해 그룹 회장을 맡았다. 최종현은 그를 ‘동업자’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최종현의 그림자라고 표현했다.

1941년 2월6일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손길승은 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서울대 상대에 진학했다. ROTC 1기로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손길승은 대학 동기이자, ROTC 경리장교 동료였던 이순석(전 ㈜선경 부회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최종현을 만나게 된다. 이순석과 최종현은 동향이자 대학 선후배로 이미 잘 아는 사이였다.

당초 손길승의 마음 속에는 선경직물이 없었다. 명문대 상대를 졸업한 그에게 중소 직물회사가 희망일 수는 없었다. 최종현을 만나게 된 것도 절친한 친구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종현과 깊숙한 대화를 나누면서 손길승은 진로를 대학원에서 선경직물로 바꾸게 된다. 기업인으로서의 최종현의 경영 철학에 감명을 받았고, “이런 사람이라면 인생을 던져 함께 일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965년 12월 손길승은 이순석과 함께 대졸 신입사원으로 정식 입사했다. 선경직물이 처음으로 대졸 신입사원을 뽑은 것이다. 특히 명문대 출신을 두 명이나 얻게되자 최종현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뻐했다.

최종현은 손길승을 아꼈고, 손길승은 ‘열심히’ 일했다. 손길승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일벌레’라고 말하면서 앞에 ‘지독한’이라는 수식어를 빠뜨리지 않는다. 일은 그에게 삶의 가치이고 목적이었다. 손길승은 “일을 통해 생긴 스트레스는 일로 푼다”고 말할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살았다. 실무자 시절 그의 특기는 밤 새우기였고, ‘9일 밤새우기’기록은 지금도 SK그룹에서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당연히 출퇴근이 따로 없었다. 꼭두새벽이라도 일이 생기면 부하 직원의 집에 전화를 걸어 업무에 대해 물어보곤 했다. 당시 손길승과 함께 일했던 김수길 SKC고문 역시 손길승을 ‘지독한 일벌레’로 기억했다.

“손 회장은 사무실에 침낭을 갖다 놓고 한 달이면 열흘은 회사에서 잤습니다. 1970년 봄인가, 결산과장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며칠 동안 회사에서 밤을 새다가 결국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한 달 이상 병원신세를 졌죠. 계산기에 곱셈 기능도 없던 시절이라 결산 업무가 만만치 않았거든요.”

손길승은 이후 총무부로 자리를 옮겨 1978년 6월부터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을 맡는다. 그의 직급은 이사에서 상무·전무·부사장·사장·부회장으로 올라갔고, 계열사 최고경영자를 겸임했지만 ‘경영기획실장’ 이라는 직책은 1998년 9월 그룹 회장이 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최종현이 계열사 경영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룹 계열사 조정 역할은 경영기획실장인 손길승의 몫이었다. 대부분 자금 문제였다. 특히 전무 직급으로 나이 많은 계열사 사장들을 상대할 때는 반발도 심했다. 그러면서도 손길승은 워커힐호텔·유공·SK증권·한국이동통신·SK생명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확장하면서 오늘날의 SK그룹을 완성해 나갔다.

최종현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신뢰했다. 계열사의 경영 뿐만 아니라 그 조정까지도 손길승을 통해 전문경영인에 맡긴 셈이다. 그렇다고 최종현이 모두 맡기고 물러나 있은 것도 아니었다. SK그룹의 전문경영인 체제에 대해 최종현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문경영인은 능력에 따라 평가받기 때문에 5~10년 정도의 중기 정책 밖에 세울 수 없다. 그러나 회사는 때로 20~30년의 일관된 장기정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소유주가 존재하면서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맡도록 혼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소유주로서 나는 SKMS와 수펙스 교육, 향후 사업에 대해서만 의논하고, 사장에게 가능한 많은 권한을 주고 있다. 인사·투자·자금·기술 등은 전부 사장의 권한이다.”

실제 SK그룹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했던 한 임원은 “최종현 회장이나 손길승 회장은 단 한 번도 인사 부탁을 한 일이 없었다”며 “그것은 원칙과 이를 지키고자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1998년 8월26일 최종현이 폐암으로 세상을 뜨자 손길승은 그룹 회장에 추대됐다. 주위에서는 전문경영인이 총수의 역할까지 대신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그룹 회장에 오른 손길승은 그룹 내에서 영원한 맞수였던 김항덕(전 유공 사장)을 곧바로 회장 대우 상임고문으로 영입했다. 회장 집무실 옆에 자신의 방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만들어 제공했고, 중대한 경영 현안이 있을 때마다 상의했다.

김항덕 고문은 “손 회장은 그룹의 궂은 일을 마다 않고 떠안았던 사람”이라며 “손 회장이 그만두면 내가 그 일을 맡을 수는 없지만 내가 그만두더라도 손 회장은 내 자리를 메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손길승이 지휘한 SK그룹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외환위기를 맞아 대부분 재벌 기업들이 불황을 겪는 상황에서도 SK그룹은 오히려 절정을 구가했다. 여론은 “전문경영인과 대주주의 파트너십 경영 체제의 성공”이라며 “한국형 기업문화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손길승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거쳐 2003년 2월에는 전경련 제28대 회장에도 오르게 된다. 손길승은 오너로서 최종현의 역할까지 훌륭하게 수행한 셈이다. SK그룹의 한 임원은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종현 회장이 자기 스타일로 키운 사람이 손길승 회장입니다. 최 회장이 출근하면 맨 먼저 경영기획실장을 찾았고, 두 사람은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였죠. 끊임 없는 토론을 통해 경영철학을 공유했기 때문에 손 회장의 경영철학은 한마디로 최 회장과 똑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요체가 바로 SKMS와 수펙스입니다.”

손길승은 최종현의 가신도 아니었고, 머슴과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최종현은 사석에서 손길승을 ‘동업자’라고 표현했다. 최종현은 손길승 뿐만 아니라 젊은 사원들에게도 ‘유(You)’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영어의 2인칭 대명사인 이 말에는 상대에 대한 최종현의 존중이 깔려 있었다.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아니라 일을 통해 맺어진 인간 관계에 대한 깊은 존중이었다.

손길승은 일상에서도 불필요한 말은 삼가했고, 개인적인 문제를 회사에 대입시키는 경우도 없었다. 그룹 회장으로 있던 1999년 3월 차남이 결혼식을 올렸지만 외부에 전혀 알리지 않아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또 그 해 5월 모친이 별세했을 때 손길승은 “SK그룹 임직원들은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 사장단만이 간신히 조문을 할 수 있었다.

손길승은 지난 9월22일 보석으로 풀려나 최종현의 묘소를 찾았다. 재계인물현대사 취재팀은 그에게 수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항소심 공판이 진행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한사코 사양했다. 사법부가 지금 그의 죄를 묻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공에 대한 얘기가 금기일 수는 없다. 그의 삶이 전체적으로 한국경제에 밀알이 됐음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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