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주 전 SK그룹 회장 비서실장은 1981년 3월말 영국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비서실장을 마친 뒤 런던지사장으로 발령받은 조영주는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최종현(전 SK그룹 회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날 오전 최종현의 일정에는 현지 협력업체 임원들과의 골프 회동이 잡혀 있었다. 최종현 일행은 곧바로 크로이던 골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눈감고도 골프장을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하던 직원이 중간에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앞에 타고 있던 조영주와 운전을 맡은 런던지사 직원은 새파랗게 질렸다. 20~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1시간 넘게 걸려서 갔다. “왜 이렇게 먼 데를 예약했어?” 최종현이 무심코 던진 말에 조영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겨우 시간에 맞춰 골프장에 도착했다.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골프를 마친 최종현 일행은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20분밖에 안 걸리는 것이 아닌가. 조영주는 “도로공사를 하는 바람에 그만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라며 이실직고했다. 명색이 비서실장 출신 아닌가. 의전만큼은 자신있다고 자부했는데. 조영주는 간이 콩알만 해졌다. 그러나 최종현의 반응은 의외였다. 너털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촌놈들, 나도 시카고에서 유학했을 때 그런 적 있었어.”

최종현은 직원들의 실수에 대해 관대했다. 전형화된 재벌 총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말년에는 담배를 끊었지만 최종현도 한때는 담배를 피웠다. 80년대초 유럽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는 비행기안에서의 일이었다.

최종현은 일등석에, 당시 비서실장인 정도미노는 비즈니스석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당시에는 기내 흡연이 가능했고 최종현은 담배를 얻으려고 두 번이나 비즈니스석을 찾았다. 정도미노는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곯아떨어져 있었다. 최종현은 비서실장을 깨우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옆자리의 서양 여인이 켄트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최종현은 “한 대만…”하고 청했더니 3개비를 꺼내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최종현으로부터 이를 들은 SK그룹 한 임원이 “정 실장, 그렇게 모시면 어떻게 해?”라며 정도미노를 질책했다. 그러나 최종현은 정도미노를 두둔했다. “놔둬, 비행기안에서 그렇게 잘 자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최종현을 지근에서 모셨던 비서실장들은 최종현의 인간적인 측면, 재벌총수답지 않은 소탈함에 대해 입을 모은다. 사례를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다. 그는 80년대 이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경기도 이천 계원농장에서 가족 혹은 지인들과 함께 주말을 보냈다. 최종현은 알려진 바와 같이 집이 없었다. 쉐라톤 워커힐 호텔안에 있는 50여평 빌라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을 하는 가정부가 음식을 준비했다. 그런데 가끔 워커힐 호텔에서 음식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럴 땐 최종현은 혹시나 가정부의 기분이 상할까봐 눈치를 봤다고 당시 비서실장은 전한다. 최종현은 이렇듯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했다.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그의 특성은 회사 경영에도 깊숙이 배어있다. 이러한 최종현의 자취는 현재 SK그룹 기업문화에도 뚜렷이 남아있다.

최종현은 계열사 사장의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했다. 그는 직접 결재하지 않고 계열사 사장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단적으로 SK그룹 성장의 큰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공(현 SK㈜)이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시에도 그의 이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유공의 경우 인수 이후 2년동안 사장직을 맡아 직접 경영했지만 회사가 정상화된 뒤에는 김항덕(현 SK고문)회장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또 한국이동통신 역시‘테크노크라트’인 서정욱 전 과학기술부 장관에게 맡기고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최종현은 그룹의 회장은 그룹 계열사의 실무를 챙기는 대신 10년 앞을 내다보고 이에 대해 준비하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업이 하나의 결실을 보려면 10년 이상이 걸리고 이를 위해 착실하고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최종현은 ‘미련할 정도로’ 계열사 사장을 신임했다. 사장을 포함한 계열사 임원에 대한 그룹 차원의 감사 활동도 아예 없앴다.

최종현은 이렇게 말한다. “항상 어깨너머로 그를 감시한다면 감시하는 사람도 괴롭고 감시받는 사람도 지겨울 게 아니냐. 사장에게 전권을 맡기면 그만큼 사장의 책임이 커지게 된다.”

믿지 못할 사람이라면 애시당초 계열사 사장으로 쓰질 말고 만일 사장으로 앉혔으면 최대한 그를 믿고 지원해야 한다는 게(疑人不用 用人不疑) 최종현의 용병술이었다.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최종현의 경영 방침은 단지 사장 등 임원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다. 1970년대말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직원 출퇴근 카드제를 없앴다. 자율적으로 작업에 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부서장은 직원들의 실질적인 업무 수행에 대해 초점을 맞춰 관리하라는 취지였다.

자율성과 창의력을 높이 평가하는 SK그룹의 문화는 최종현의 경영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며 최종현 스스로도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동통신사업 진출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SK그룹은 대한텔레콤을 설립,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한텔레콤은 1990년대초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에 뛰어들면서 외국계 통신업체들을 참여시키기에 분주했다. 대한텔레콤 실무를 총괄하던 목정래 SK고문은 이 업무를 일임받았다.

그런데 미국의 유수 통신업체 B사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다. 목정래는 아쉽긴 했지만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이 업체는 최종현에게 접근했다. 한국 기업의 경우 총수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에 최종현만 설득하면 일이 풀릴 수 있다는 게 그들 생각이었다.

그 때 최종현은 “실무 담당자하고 이야기를 해야지 왜 나하고 이야기를 하는가. 실무선에서 OK를 하면 나도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면박을 줬다. 최종현의 경영 방식과 SK그룹의 기업 문화에 대해 잘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큰 코를 다친 것이다. 결국 대한텔레콤 컨소시엄에는 이 업체 대신 미국의 통신업체 GTE, 영국의 이동통신업체 보다폰 등이 참여하게 됐다.

최종현은 또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다. 특히 수원 지역 친지들에게는 냉혹하리만큼 차가웠다. SK그룹 계열사의 직원으로 있던 친지 K는 수시로 최종현 집무실에 드나들었다. 최종현은 짬이 나거나 마주칠 때마다 K와 차 한잔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즐기곤 했다.

그런데 K는 나이와 봉급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단순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계열사 사장들은 한번 문제 제기를 했다. 일가 친척이니 그럴듯한 직책을 맡겨 체면도 살려주고 보람도 갖게 해주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으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현은 이에 대해 명쾌하게 답한다. “K가 아무리 법없이 살 사람이라지만 절대 그렇게 하면 안돼요. K에게 회사 경영을 맡기면 금방 수십억원을 들어먹을 겁니다. 차라리 자기 실력에 맞는 일거리를 맡기고 그에 상응하는 봉급을 주는 게 낫지요. 가까운 친지에다가 선량하다는 이유만으로 중책에 기용할 순 없어요. 경영 부실과 적자 누적, 투자자들의 손실을 각오한다면 몰라도….” 최종현이 이렇게 말하자 그 이후 계열사 사장들은 이 일을 두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자율성과 계열사별 독립성을 강조하는 최종현의 경영 방식은 SKMS와 수펙스 추구에 수렴돼 현재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의 경영 방식은 최종현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임직원들과의 토론을 통해 합의점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SK㈜의 한 사외이사는 이러한 최태원의 모습에 대해 “회장이 모든 것을 총괄해 의사결정을 하거나 책임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남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태원은 이와 함께 올해초부터 여러차례 지배구조개선을 통한 기업가치 제고를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지난 3월 주총에서 사외이사 비율을 70%로 확대하고 이사회내 4개 전문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이사회 중심경영, 즉 ‘포스트 재벌’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외부 평가를 받고 있다. 재벌기업 총수였으나 재벌 총수답지 않았던 최종현의 생각이 시대 변화에 맞게 과학적·조직적으로 발현되고 있음을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산업부 특별취재팀] 박영출기자·유회경기자·노윤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