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금은 톱스타가 된 한석규와 최민식이 ‘초짜’로 출연했던 MBC 드라마 ‘서울의 달’(94년)을 기억하시는지. 극중 제비가 돼서 서울에 약삭빠르게 편입한 한석규는 이 드라마로 단박에 떴고 우직하게 시골스러운 삶을 고집하던 최민식은 극밖에서도 여전히 별 주목을 받지 못해, 한석규가 인터뷰할 때마다 “민식이형에게 주목해달라”고 하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배역 하나. 바로 한석규네 달동네집 식구의 한사람인 미술선생님 백윤식이었다. 깊게 쌍꺼풀진 눈과 흰 피부의 미남형 얼굴, 유난히 낮게 깔리는 저음, 온몸에 밴 과잉매너는 고독한 지식인연하며 속없는 여자들과 염문을 일으키는 역할에 제격이었다. 백윤식이 가진 가장 대표적 이미지, 다소 느끼한 꽃미남, 얼굴과 매너로 여자를 후리는 사기꾼의 이미지는 이때 바로 형성됐다.

‘서울의 달’ 이후에도 백윤식은 고만고만한 조연급 탤런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배우로서 그를 새롭게 각인시킨 것은 2003년 장준환 감독의 엉뚱하고 기발한 SF영화 ‘지구를 지켜라’였다. 이 영화로 뒤늦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백윤식은 이어 ‘범죄의 재구성’에서의 호연으로, ‘뒤늦게 발견한 대배우’라는 충무로의 상찬을 들었다.

두 영화 모두에서 코믹 캐릭터를 연기하지 않았음에도 백윤식은 곧바로 ‘얼굴만 봐도 웃기는’중년남자 코믹배우 대열에 합류했고 이어 SBS 일일시트콤 ‘압구정 종갓집’의 ‘가장’ 역할로 투입됐다. 최근에는 미스터킴(김태욱)의 뮤직비디오 ‘담백하라’에 출연해 화제가 됐고 이어 CF모델로도 만만찮은 상품성을 입증해보였다. 조인성과 투톱으로 출연한 M남성화장품은 광고 이후 매출이 급상승했고 P포털 광고 역시 전지현 문근영 등 빅모델 전략의 경쟁광고에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30여년 연기생활에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백윤식이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백윤식의 인기는 엉뚱하다, 깬다는 말로 표현되는 ‘의외성’이라는 이 시대의 트렌드에 잘 부합한다. 가령 남성화장품이나 포털광고, 뮤직비디오 등은 50대 남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터넷, 화장품, 로커라는 자리에 백윤식을 위치시킨 ‘의외성’에 기대, 성공을 거둔 대표 사례다. 백윤식의 인기는 동시에 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사회적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중년남성에 대한 우리사회의 시선도 함께 보여준다.

TV시트콤에 출연한 백윤식은 말하자면 90년대 후반 중년남성의 탈권위전략을 펴 점잖은 중년탤런트들을 집중적으로 망가뜨려온 TV(주로 SBS) 일일시트콤이 찾은 뉴페이스로, 오지명 박영규 신구 노주현 등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나 오지명 박영규가 시트콤에 출연하면서 코믹 캐릭터 외에 배우로서의 이미지 자체가 다소 증발돼 버린 것과 달리, 백윤식은 영화에서의 열연처럼 배우로서 자기몫을 여전히 굳게 지키고 있다.

또 코믹하고 희화화된 중년남성을 연기해도 오지명 박영규가 주책맞고 시대에 뒤처진 구세대거나, 수다스럽고 속좁고 유치해(이는 전통적으로 여자나 아이들의 특성으로 치부돼왔다) ‘쫌스런’ 남자들로 그려진 것과 달리(오지명은 한 아이스크림 광고에서 아이스크림 이름을 잘못외워 주문에 서툰 한심한 아저씨로 나왔고 ‘순풍산부인과’의 실직자 박영규는 아줌마같다), 백윤식은 전통적 남성의 카리스마나 남성성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것이 큰 차이다.

가죽옷 차림의 로커로 나온 미스터킴의 뮤직비디오(‘담백하라’)나 P포털광고에서 백윤식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시종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를 연기한다. ‘담백하라’의 가사 역시 비슷하다. “마음변해도 사랑 남는다 그 시간은 진실했으니… 차라리 잘가하며 웃어버리자 뒷모습이 멋있어야지” 말없이 연인을 보내주는, 다소 구식이지만 쿨한 ‘진짜 남자의 순정’이 이 노래의 주제다.

‘압구정 종갓집’에서도 백윤식은 예의 배우들처럼 촐싹대는 대신 신사의 절도와 매너가 맨 말투와 행동을 보여준다. 전작 시트콤에서 오지명이나 박영규가 자신들의 기존 이미지를 탈피해 과장된 제스처와 어리버리한 말투로 스스로를 ‘웃기는 남자’로 희화화한 것과는 큰 차이다. 물론 시트콤이니 전체 상황은 당연히 코믹하지만, 백윤식은 말투나 행동거지에서의 코믹한 과장과 일탈이 없이, 즉 ‘망가지지’ 않은 채 웃긴다. 이처럼 ‘능청스럽게 웃기기’는 백윤식이라는 배우가 가진 놀라운 연기력의 결과일텐데, ‘범죄의 재구성’에서도 그가 연기한 사기꾼 김선생은 냉혹하고 비열한 캐릭터였음에도(실제 코믹한 장면도 별로 없었다) 대중의 뇌리에는 ‘웃기는 캐릭터’로 남아 있다(아무리 사악한 캐릭터를 연기해도 100% 악인이라기보다는 미워할 수 없는 인간적 연민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또한 백윤식의 힘이다).

어쩌면 그가 고수하고 있는 딱딱 끊어지는 말투, 웃음을 아끼는 진지하고 경직된 표정, 몸에 밴 과잉의 절도나 신사다운 매너 등이 이 시대에는 그 자체로 우스운 것이 돼버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백윤식은 과잉남성성의 상징인 최민수와 다르다. 최민수가 그의 과잉남성성을 드러낼 때 대중은 가부장의 시대착오적 카리스마를 조소하는 ‘최민수 시리즈’로 화답했다. 그러나 백윤식은 ‘구식의, 전통적 남성성을 버리거나 부정하지 않기’(물론 동시에 과장하지도 않기)라는 전략으로 탈가부장 시대에, 대중의 호감 속에 살아남은(오히려 전성기를 맞은) 아주 특이한 배우다.

양성희기자 cooly@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