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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여성의 팬터지는 뒤집어 말하면 가난하고 예쁜 신데렐라를 구원하고자 하는 남성의 팬터지와 같다. 여성들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곧 남성들의 백마 탄 왕자님 콤플렉스인 것이다. 그리고 여성에게 로맨틱 팬터지가 필요하듯 남성에게도 로맨틱 팬터지가 필요하다

최근들어 다소 부침을 겪고 있지만 종반으로 치닫고 있는 SBS ‘파리의 연인’이 근래 가장 성공한 TV로맨스물인 것은 분명하다.

이 드라마의 특징중 하나는 남성들의 시청이 많았다는 것(물론 전체적으로 여성시청률에 크게 못미치지만). 통상 로맨스 비애호층으로 분류되는 남성들을 TV앞으로 끌어들여 로맨스를 즐기는 남성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파리의 연인’을 남성에게도 먹히는 드라마로 만들었을까. 그 답이 박신양에게 숨어 있다.

‘편지’나 ‘약속’같은 로맨스영화에 출연한 적은 있지만 박신양은 전형적인 로맨틱 히어로와는 거리가 있는 배우다. 데뷔 초기엔 감성적이고 지적인 이미지를 내세웠지만 평균이상의 반응을 얻지 못했고, 배우로서의 진가는 오히려 사기꾼으로 나온 ‘범죄의 재구성’, 스님과 맞짱 뜨는 조폭으로 분한 ‘달마야 놀자’같은 영화들에서 발휘됐다.

지적이고 건실해보이는 이미지를 아예 야비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릴 때 생기는 의외성이 그가 가진 가장 강한 매력으로 지목됐던 것.

‘파리의 연인’이 시작할 때 박신양이 과연 TV의 로맨틱 코미디에 잘 어울릴까 하는 기우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꽃미남 계보의 전형적인 로맨틱 히어로가 아니라는 점이 남성시청자들을 이 드라마에 불러 모으고 결과적으로 대박을 터뜨린 한 요소가 됐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가 맡은 한기주라는 인물을 보자. 갈등구조가 아주 유사한 ‘발리에서 생긴 일’을 비롯해 재벌이 나오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보면 ‘발리…’의 조인성, ‘황태자의 첫사랑’의 차태현, ‘풀하우스’의 ‘비’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망나니 왕자’들이 나온다. 한마디로 이 망나니 왕자님들이 가난하지만 착하고 예쁜 여자를 만나 사람되는 얘기들인 것이다.

그런데 한기주는 다르다. (김정은을 만나기 전까지)여자를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을 빼고는 결격사유가 없다. 일도 잘하고 인간성도 좋다. 냉철하지만 냉혹하거나 비열하지 않다. 재벌왕자님치고는 외양도 평범하다. 환상적 신체비율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조인성처럼 스타일리시하지도 않고, 권상우같은 몸짱도 아니다. 그저 조금 잘 차려입은, 양복입은 평범한 남자다.

배용준이나 장동건처럼 남성들에게 좌절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미끈한 로맨틱 히어로가 아닌데다가, 캐릭터도 뒤틀린 데가 없으니 남성시청자의 무의식적 경쟁심과 반감은 절로 줄어든다.

한기주라는 캐릭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들과의 관계는 좋으면서 여자들과의 관계는 극히 서투르다는 것인데(단 생모인 누나 정애리는 예외로 두사람의 관계는 연인같다), 드라마 초반부 재미는 연애초보 박신양이 연애의 관습들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잔재미들이었다(박신양과 김정은이 ‘제대로’ 연애하고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드라마의 극적 재미는 반감되고 있다).

여자들과 관계맺기, 혹은 연애하기에 미숙한 것은 그가 김정은에게 쓰는 말투와 행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가정부 출신인 김정은에게 약혼 이후에도 ‘그만 하지’‘이렇게 해보지’ 같은 명령조의 하대하는 말투를 계속 쓴다. 물론 연애감정이 없는 전처에게는 이런 말을 쓰지 않으므로 이 하대의 말투는 사랑의 표현이다.

또 장안의 유행어가 된 ‘애기야, 가자’라는 대사에서처럼, 연인을 공개적으로 ‘애기’라고 부른다(애기는 둘만의 은밀한 호칭이 아니라 공개석상에서 남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이처럼 모성에 대한 강한 동경과 신비화(여자를 어머니와 애인으로 나누는 마초적인 이분법), 여성들과의 수평적 관계맺기의 미숙함, 막강한 재력과 능력으로 보호의 대상인 연인 ‘애기’를 궁상스러운 가난과 희망없음에서 구원해올리기까지 박신양은 마초 기질을 가진 평범한 남성들의 로맨틱한 환상을 반영한다.

노골적으로 남성호르몬이 넘쳐나는 마초의 전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스트도, 플레이보이도 아닌, 이를테면 로맨티시즘으로 무장한 ‘로맨틱 마초’인 것이다.

박신양이 ‘사랑해도 될까요’를 부르며 김정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그런 로맨틱 마초의 환상과 순정이 극대화된 장면일 것이다. 로맨틱 마초의 짓궂은 장난 ‘애기야’가 장안의 유행어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해도 될까요’를 부르는 이 장면은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떠올랐고 ‘유리상자’의 원곡까지 인기가 치솟았다.

양성희기자 cooly@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