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선희(40)의 숱한 히트곡 가운데에는 만화 영화 ‘달려라 하니’의 주제가가 있다. 지난 88년 KBS TV를 통해 첫 방영된 이후 만화 주인공으로서는 ‘아기 공룡 둘리’와 함께 쌍벽을 이뤄온 하니. 작은 몸집이지만 그 종잡을 수 없는 오기와 배짱으로 똘똘 뭉쳐진 그에게서 우리는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조선 여인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안경을 썼다는 것만 제외하고 이선희는 하니와 무척이나 닮았다. 평소 얌전한 말투와 태도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지만 일단 무대에 오르면 당찬 가창력으로 관객들을 두 주먹 불끈 쥐게 만드는, 그 야무진 재주. 어떤 악조건에서도 하염없이 노래를 부를 것만 같은 느낌은 지난 84년 7월30일 밤 남이섬에서 열렸던 MBC 강변가요제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빌려입은 치마를 입고 ‘아줌마 파마’를 한 채 무대위에 나타난 조그만 체구의 그를 어느 누가 눈여겨 보았을 것인가. 그러나 노래가 끝난 뒤 TV를 시청하던 모두의 입은 벌어졌고 그는 대상을 먹었다. 요즘처럼 열대야가 기승을 부렸던 그날 밤 그의 노래는 전 국민의 불쾌지수를 절반 이상 끌어내린 공로만으로도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어쨌든 그건 우리 가요계에 ‘키 작고 목청 큰 여가수’의 시조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실제 그의 출현 이후 강변가요제에서는 전유나, 유미리 등의 ‘이선희과 가수’들이 입상하는 전통같은 것이 생겼다.

이선희가 올해로 가요계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소녀에서 중년으로 넘어가고도 남을 세월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소녀같은 구석이 남아있다. 2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이선희를 지난 7월 29일 서울 소공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가요제 전날 생전 처음 파마란 걸 한거죠.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는 붕 떠있고 정말 꼴불견이더라고요. 뭐, 어차피 외형적인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제가 봐도 촌스러운 모습이에요. 호호.”

이선희가 그날 밤 불렀던 노래 ‘J에게’는 장씨냐, 정씨냐, 조씨냐, 진씨냐를 두고 하릴없는 논란을 일으키며 국민가요로 거듭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이니셜에 대한 호기심은 사람을 묘하게 자극하는 법. 이 노래는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이후 이니셜이 들어간 제목으로는 한국 땅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남게 된다.

이 노래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당시 각종 신문과 잡지 제목만 들춰 봐도 알 수 있다. ‘독집 낸 뒤 본격 활동할래요, ‘J에게’로 가요계의 새별된 이선희양’(동아, 84.11.13) ‘가수 이선희, ‘J에게’한곡 불러 신데렐라로’(조선, 84.11.10) ‘J의 연인―학생 가수 이선희양, ‘모든 사람의 추억’이 인기 비밀’(한국, 84.12.18) 등등.

“가장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노래죠. 제가 처음으로 노래를 하게 한 추억 때문에…. 고등학교때 작곡가 이세건씨를 만났는데 그 분에게서 이 노래의 악보를 받았어요. 그리고 1년6개월동안 끌어안고 있었죠. 친구들에게 들려주며 같이 울기도 하고 학교 축제 때 불러서 제법 인기를 얻었어요. ‘언젠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었죠.”

‘J에게’의 가사와 멜로디에서 드라마틱한 절정은 찾아 볼 수 없다. 어찌보면 평범하고 단순한 가요다. 그런데 이걸 이선희가 부르면 달라진다. 소설의 행간이나 영화의 복선을 읽는 것처럼 노래 마디마디마다 이선희 특유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래서 노래방에서 무심코 이 노래를 불렀다가는 “그만 좀 꽥꽥대지”란 친구들의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면/난 오늘도 조용히 그대를 그리워하네/J 지난밤 꿈속에 J 만났던 모습은/내 가슴속 깊이 여울져 남아 있네/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J 난 너를 못잊어 J 난 너를 사랑해/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길을/난 이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다방에서 커피 한잔 홀짝거리다 이 노래가 나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괜스레 옷깃을 여미고 낙엽이 뒹구는 덕수궁 돌담길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까지 들게했던 기억. 노래는 추억을 만들었다.

‘J에게’이후 이선희의 ‘추억 시리즈’는 계속됐다. ‘아,옛날이여’(1985), ‘알고 싶어요’(1986), ‘영’(1987), ‘나 항상 그대를’(1988), ‘사랑이 지는 이 자리’(1988), ‘아름다운 강산’(1988), ‘나의 거리’(1989), ‘한바탕 웃음으로’(1989),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1990) 등의 히트곡 릴레이는 그가 지난 91년 서울시의원에 당선될 때까지 이어졌다.

“양인자, 김희갑 선생님이 작사, 작곡하신 노래 ‘알고 싶어요’는 두 분이 30~40대때 나눴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예요. 저는 멋도 모르고 20대에 그걸 불렀는데 이제서야 그 노래의 느낌을 알 것 같아요.”

20년전과 어디가 변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을 것 같은, 여전히 애띤 표정의 얼굴.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변화가 그의 안에서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자연인의 모습이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떼내고 호사스러운 가면을 벗은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자연인. 그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앞에 선 누이처럼 초연하길 원했다.

“조명이나 음향이 더 거대하고 화려해지는 걸로 사람들에게 감흥 주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아요. 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제가 신경쓰는 건 오로지 음악과 저 자신이에요. 제 가슴을 관객들과 나눌 수 있는 시간, 그것만 생각하며 연습하는 겁니다. ‘J에게’를 그전과 다른 방식으로 노래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싫어요. 그 노래는 이미 그걸로써 사랑을 받았던 노래이니까요.”

그는 이달말 발표를 목표로 13집 앨범을 작업중이다. 지난 3년동안 꼬박 매달려온 앨범. 이 앨범에서도 자연인으로서의 이선희를 느낄 수 있다.

악기가 많이 들어간 음악보다는 자신의 목소리 자체를 드러낼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 조미료를 치지 않은 재료 자체의 맛을 보여주겠다는 뜻이다.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가사의 문맥이 맞지 않더라도 연연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겠다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저는 거꾸로 가는 사람같아요. 어렸을 때보다 점점 더 단순해지고 있는거죠. 많은 가수들이 ‘뮤지션’으로 기억되길 원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가수 이선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20년동안 노래하면서 그것에 걸맞은 책임감도 생겼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단지 다시 20년뒤에 사람들이 저를 봤을 때 ‘이선희다. 저 사람에게 좋은 노래가 있지’, 그 정도로 기억되면 황송할 뿐이죠.”

이승형기자 lsh@munhwa.co.kr

편집〓이주영기자 jy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