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자 문화일보 ‘북리뷰’의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의 사서 읽은 책’에서 강유원씨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음, 그린비)에 대한 비판한 데 대해 이 책을 펴낸 그린비의 유재건 사장이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북리뷰’는 유씨의 반론이 생산적인 논쟁의 계기가 되길 기대하며, 이 글을 싣습니다.

살아가면서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도 수많은 견해나 해석이 존재한다는 걸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출판사에서 ‘고전 다시 쓰기’라는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를 기획할 수 있었을 겁니다. 모든 사람이 한 텍스트에 대해 느끼거나 해석하는 게 동일하다면 고전을 굳이 ‘지금-여기의 시점에서 다시 써보자’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동일성의 논리를 거부하는 저도, 제가 만든 책에 대해서는 독자들도 저와 같이 느껴야 하며, 또 느껴줄 거라는 환상을 갖곤 합니다.

저는 환상은 현실에서 깨질 수밖에 없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더라도 지난 3월 11일자‘문화일보’에 실린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의 서평과 같은 방식으로 깨져야 하는 환상이라면 저는 그 환상이 깨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강유원이 생산적인 논쟁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서평은 책 만드는 사람인 제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든 책이 누군가에 의해 찢겨져서 쓰레기통에 처박히다니요.

그 서평에서 강유원은 “연암의 웃음과 역설은 흉내내고 있으나 불온한 사회 비평 정신은 온데간데 없다. 외려 프랑스의 얼치기 유목주의자에게 빌린 상투어 두어 개와 이상야릇하게 재해석된 마르크스의 언어가 ‘열하일기’ 해석에 동원되면서 연암은 졸지에 18세기 판 개그 작가로 전락한다”고 분개합니다.

지금 우리 출판사에서는 내년 출간을 목표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완역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매주 번역자들과 만나 원고를 검토하고 있는데, 전 그때마다 연암의 예기치 않은 유머에 깜짝 놀라곤 합니다. 사실 개그 작가든, 시대를 선도한 개혁혁명가든 연암의 정체성은 보는 사람의 세계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연암이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불온하게 체제 이탈을 감행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조선 후기의 숨막히는 사회체제 하에서 연암은 전략적으로 엄숙한 고문체를 벗어난 글쓰기를 시도했습니다. 연암의 작품이 보여주듯, 유머란 상황을 비틂으로써 현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현실을 전복하는 고도의 전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그가 어때서 강유원은 ‘전락’ 운운하면서 분노하는 걸까요? 혹시 강유원은 유머나 개그를 ‘개그 콘서트’의 그것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그가 말하는 불온한 사회비평 정신은 뭔가요? 사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나온 뒤 독자들의 반응은 별 하나에서 별 다섯까지 극과 극이었습니다. 고미숙의 책은 문체에서부터 연암을 보는 입장까지 지금까지의 일반 통념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특히 연암과 다산을 대비하면서 그들의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드러낸 ‘보론’은 인문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선취한 탁월한 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존의 방식을 거스르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불온한 게 아니라면 뭐가 불온한 겁니까? 세상에는 강유원 방식의 불온도 있고, 고미숙 방식의 불온도 있는 겁니다. 제겐 원칙을 강조하면서 높은 톤의 목소리로 분노하는 강유원의 방식보다는 유머로써 날씬하게 조롱하고 비웃어주는 고미숙의 방식이 더 불온해 보입니다. 들뢰즈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독일 철학의 ‘대가’인 헤겔을 전공한 강유원에게는 얼치기일지 몰라도 푸코 같은 이에게는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문제적인 철학자입니다.

강유원은 앉아서 분노만 하진 않습니다. “고미숙판 열하일기의 장난글은 밥맛만 떨어지게 했다”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한 뒤, 불온하게도() “고미숙의 책을 통독한 뒤 (‘누가 혹시라도 쓰레기 더미에서 집어다 읽을까봐 군데군데 책장을 찢어서’ ―문화일보 기사에서는 빠졌지만 강유원의 홈페이지에는 있는 표현입니다) 내다 버”리는 실천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강유원은 전투적 비평과 감정적 비난을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 강유원의 글은 제게 니체가 한 말을 떠올립니다. “너의 열매들은 잘 익었다. 하지만 너, 너는 너의 열매들을 감당할 만큼 익지 않았다.”

저는 세상은 소통하면서 사는 거며,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문제는 ‘과잉’이 아니라 ‘과소’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콘크리트’ 같은 삶”을 깨부술 수 있는 다양한 발상과 시도들이 사방팔방에서 차고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희망사항도 아니고,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사실 출판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땅엔 필자, 번역자, 연구자가 너무도 부족합니다. 강유원이 도시락 싸들고 말리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같은 연구실도 몇 십 개쯤은 되어야 하고, 강유원 같은 ‘회사원 철학박사’도 수백, 수천명은 되어야 합니다.

마침 강유원이 헤겔 원전을 11년이나 강독했다고 하니, 저희 출판사 리라이팅 클래식의 필자로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내공이 헤겔과 독일철학에 입문하려는 많은 독자들의 길잡이가 된다면 출판하는 사람으로서 그 이상의 보람은 없을 테니까요.

유재건/그린비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