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 척박한 한국 정치에 정착시킨 것은 사실 역설이긴 하지만 ‘대업적’이다. 여전히 그에 대한 증오 때문에 이를 그에 대한 미화라고 한다면 유치한 생각이다. 그는 재임중 거듭 약속했다. “단 하루 더도, 덜도 하지 않겠다.” 그는 그런 약속을 마침내 지켰다. 정치인이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시절의 공약대로 정치보복과 지역감정의 멍에에서 벗어났다면 역사는 지금과는 달리 기록할 것이다. 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도 유감스럽게 정치보복과 지역감정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그 포로가 됐었다. 만약 전씨 이후의 대통령들이 이 지긋지긋한 정치보복과 지역감정을 청산하기 위한 역사적인 획을 그어왔다면 한국 정치는 일취월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런 면에서 전씨 이후의 대통령들은 적어도 정치에 있어서는 ‘무임승차’한 셈이다. 자신들은 이 나라의 정치발전을 위해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제 닭 잡아먹듯하면서 권력에 취해 즐기다가 임기를 마쳤다.

철새 정치인들의 변절과 배신이 춤을 추는 저질의 정치가 5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역대 대통령들이 줄을 바꿔서지 않는 정치인들을 보복하고 불이익을 주는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전씨 세력에 정치 보복을 가한 세력은 전씨 정권으로부터 재빨리 줄을 바꿔선 세력이었고, YS 세력에 의해 보복을 당한 세력은 3당합당 이후에도 민정계를 우직하게 고집한 인사들이었다. 내통하면서 지낸 정치인들은 다들 살아남았다.

이런 판에 철새 정치인들에게만 욕을 퍼부어대는 것도 사실상 가혹행위에 가깝다. 누구보다 정치인 자신의 죄는 본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다가 정권이 바뀌면 결국 경기도 의왕의 서울 구치소로 향한다는 불길한 조짐 역시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다. 98년 DJ 집권 이후 그야말로 ‘떼를 지어’ 한나라당에서 국민회의(의원 20명)와 자민련(의원 14명)으로 날아갔다. DJ나 JP는 지금 민주당과 자민련을 떠나는 정치인들을 욕할 자격도 없다.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지금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셈인데, 사실 요즘 JP가 구시렁거리는 것도 구차스러워 보인다.

철새 정치인들은 지역구 민심이 바뀌어 다음 선거에서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적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상당한 거짓말이다. 제 잘못은 제가 잘 알기 때문에, 정치 보복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감 때문에, 무엇보다 철창행을 피하기 위해 강자의 우산 밑으로 몰려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실 철새 정치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묻지마 영입’이다.

지금 민주당이나 자민련을 탈당한 의원들의 탈당 순서는 DJ 집권후 이회창 후보에게 비수를 꽂은 순서, 가슴에 못을 박은 순서, 그리고 구린 데가 많은 순서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 이 후보가 “하늘이 두쪽나도 정치보복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고 있지만, 적어도 정치인은 그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5년 내내 부정부패하고 나쁜 짓하다가 강자의 품 안으로 찾아 들어가 용서받고 면죄받는 풍토가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보복의 악순환과 지역감정이야말로 다음 대통령이 반드시 고리를 끊어야 할 문제지만, 그렇다고해서 5년 내내 축재하고, 권력남용에 앞장섰다가 변절해 강자의 밑으로 들어가면 용서하는 ‘묻지마 영입’이 과연 바람직한지 생각해 봐야 한다.

정치보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권력자가 자기네 울타리 안으로 손들고 들어오면 용서하고, 남의 울타리에 있는 사람만 골라 벌을 주기 때문이다. 줄을 바꿔 권력자 밑으로만 들어가면 오히려 더 크게 출세하기 때문에 이 나라 정치가 이 꼴인 것이다.

다음 대통령이 정치보복과 법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청산의 개념을 확실히 구별하지 않고, 또 네편 내편의 경계에 따라 자기 진영 사람에 대해서는 사정의 칼을 면제해주고, 밖에 있는 미운 사람들만 벌준다면 이 나라 정치는 더 이상 희망을 얘기할 수 없다. 오히려 국민이나 야당이 볼 때 자기편, 특히 말바꿔타기의 명수들을 전혀 용서하지 않고 더 가혹하게 다스려야 한다. 보복과 청산은 구별돼야 한다.

/윤창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