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강원도 평창에는 토속적인 가을 서정이 물씬물씬 넘친다. 초가을 바람에 서걱이는 누런 옥시기(옥수수)밭과 그 사이로 수줍은 듯 얼굴을 내민 연보랏빛 벌개미취, 마을 고샅을 따라 이어지는 고추밭과 더덕밭.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의 연속이다.

그리고 ‘소금을 뿌린듯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가산 이효석 선생이 묘사한 메밀꽃. 하얀 메밀꽃이 요즘 평창군 봉평 일대에는 지천이다. 여기에 한가지 더 있다. 한국의 알프스로 불리는 대관령 초지위에 펼쳐진 양떼목장이다. 분명 이국적인 풍광이지만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멋진 장소다.

영동고속도로 면온IC에서 빠져보자. 408번 지방도. 먼지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대기가 한아름 가득 밀려온다. ‘해피 700’(인간이 거주하기에 최적의 해발고도는 700m)이라고 평창군에서 내건 입간판이 실감난다.

스키장인 보광휘닉스파크를 지나 408번 지방도와 6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 오면 사뭇 주위의 풍광도 변한다. 강원도 심심산골이 펼쳐진다. 옥수수밭 고추밭 더덕밭 천지다. 6번국도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평창무이예술관(033-335-6700)이 여행객을 반긴다.

폐교된 무이초등학교를 지난해 4월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5인의 작가가 활동중이다. 화실, 서예실, 도예실, 조각실, 가마 2기 등이 갖춰져 있고 일반관람객을 위해서는 그림전시실과 도예전시실을 개방해놓았다. 야외에는 조각공원도 있다.

앞마당에는 원두막을 갖춘 메밀꽃밭도 가꿔져 있다. 3만여평에 이른다. 예술관에서 나와 흥정천을 왼편에 바라보며 10여분 직진하면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가산 이효석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무렵’의 무대인 봉평면. 번잡스러움은 15일까지 열리는 효석문화제 때문이다.

경찰이 도로를 통제하고, 길목마다 인파가 넘친다. 호젓함은 없지만 흥정천을 가로지르는 남안교 옆에 전통장 형태로 복원해놓은 봉평장 구경은 축제에서 만나는 즐거움이다.

국화빵장수, 엿장수가 초입에 자리잡고 있고, 농기구와 약초, 햇밤을 들고 나온 장꾼들이 좌판을 벌여놓았다. 한쪽에선 국밥을 끓여대고, 메밀전병 지지는 냄새도 구수하게 퍼진다.

이제는 더 이상 만나기 어려운 시골장터 풍경이다. 아직 지방에선 5일장이 서는 곳이 많지만 대부분 재래시장으로 흡수돼 전통장터는 정말 보기 어렵다.

장터에 좌판을 차린 김용래(88·봉평면 노인회장)할아버지.

“이런 ‘삼태미’(거름 담는 도구)나 ‘주루먹’(짚으로 만든 가방)은 전에는 집에서 다 만들어 썼던 거라 원래 장터에서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여. 면장이 축제때만 되면 들고나와 팔아달래.”

비록 축제 전시효과이더라도 짚을 엮는 할아버지들의 주름진 손길에서 고향의 따스한 정을 실감할 수 있어 좋다.

남안교에서 이효석생가에 이르는 1.5㎞ 구간 곳곳에는 메밀밭이 널려 있다. 꽃은 이제 막 피기 시작해 ‘소금을 뿌린 것처럼 흐뭇’하지는 않다. 현지인들은 이번 주말인 14일쯤 만개한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관령 양떼목장(033-335-1966)은 장터에서 벗어나 장평방향으로 길을 다시 잡아야 한다. 사적지인 팔석정과 판관대를 지나 장평IC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탄뒤 횡계IC에서 빠져 다시 구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목장은 옛 대관령 상행선휴게소 뒤편 약 300m 떨어진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전영대(51)씨가 14년전부터 가꿔온 양떼목장이다. 6만3000여평의 초지위에 270여마리 양들이 새털구름처럼 자유롭게 노닌다.

초지 구릉위에 올라가 멀리 시선을 던지면 백두대간 줄기인 선자령, 능경봉부터 발왕산 등 험산준령들이 흰 구름을 머리에 이고 아스라하게 펼쳐진다. 풀밭위에 누우면 능선위의 높새바람이 걸러준 무공해대기가 축복처럼 쏟아진다. 해방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털을 깎고, 고기도 팝니다. 하지만 이 목장을 만든 진짜 이유는 도시인들에게 쉼터로 제공하기 위해서죠.” 목장주인 전영대씨의 얘기다.

아직 목장에 변변한 숙소도 없다. 그러나 40명 정도가 한꺼번에 숙박할 수 있는 단체실이 1동 있다. 그리고 양고기 바비큐장도 만들어 놓았다. 여행문의 우리문화 02-774-0044.

/평창〓이경택기자 ktlee@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