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 정치인으로 당적을 바꾼 사람들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들어있다. 정치인이 중도에 당적을 바꾸면 ‘배신자’라는 비난을 듣게 마련인데 레이건은 당시 “내가 당을 떠난 것이 아니라, 당이 나를 떠났다”고 둘러댔다.

레이건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꾼 경우지만, 이번에 공화당에서 무소속으로 옮김으로써 상원의 다수당이 졸지에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는 지각 변동을 야기한 제임스 제퍼즈(버몬트)의원도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다. 공화당이 심하게 우경화하면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추구하는 정책이 자기의 소신에서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당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제퍼즈가 무슨 변명을 하든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의원들의 눈에는 그가 배신자로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지난 11월 선거에서 제퍼즈를 지지한 버몬트주의 유권자들이나 미국 일반 시민들의 대부분이 제퍼즈의 고충을 이해하며 그의 거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또 어느 한 당이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하는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이 더 좋다는 것이 과반수 의견임을 알 수 있다. 작년 11월 선거로 공화당은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백악관 뿐아니라 상·하 양원도 장악하게 되었다. 실은 상원에서는 공화당이 다수당이 된 것이 아니라 의석분포가 50대50에 그쳤지만 가부동수일 때는 부통령이 캐스팅 보트를 던질 수 있게 되어 있는 규정에 힘입어 공화당이 다수당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퍼즈에게 ‘배신자’ 라는 비난이 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공화당의 보수화가 너무 두드러지게 된데다가 득세한 우파들이 의정활동에서 진보적인 온건파를 소외시켰다는 사정을 알기 때문에 동정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 평론가는 공화당 지도부는 상원이 마치 ‘사관학교’인 것처럼 의원들을 다루었다고 평했다.

둘째, 버몬트주의 유권자들은 제퍼즈가 진보적인 정치인임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를 당선시킬 때 유권자들의 대부분은 ‘사람에게 투표한 것이지, 당에 투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셋째, 상원 상임위원회의 위원장들이 모두 민주당으로 바뀌면서 민주당이 이미 위원장이던 제퍼즈에게 그가 좋아하는 환경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맡기기로 배려한 것 외에는, 어떤 금전이나 특혜가 관련되는 흥정이 끼여들 여지가 없어 보이는, 매우 맑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시와 공화당은 어쩌다가 이러한 반란을 자초했던 것인가. 선거 때 부시가 국민에게 제시한 비전은 감세를 주축으로 한, 보수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공화, 민주 양당이 싸우지만 말고 대화하며 국사를 다스리는 정치도 함께 제창했다. 또 불우 계층에 대한 ‘온정있는’ 보수주의도 제창했다. 하지만 부시가 취임후 보여준 것은 농후한 보수색 일변도였다. 대통령 선거 당시 부시의 득표는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진보적 제3당 후보 랠프 네이더 두 사람의 득표 합계에 비해 50만표나 적은 것이었다.

그는 또 개표 과정에서 대법원의 개입으로 간신히 당선되었다. 공화당의 상원 의석이 55석에서 50석으로 줄어든 것은 공화당이 상승세에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을 잊어버린듯 행동했던 것이다. 민주당이 상원의 다수당이 되었음에도 불구, 부시는 자신의 입법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유권자들에게 직접 어필함으로써 일부 민주당의원들이 동조할 수 밖에 없도록 하면, 획기적인 감세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것같은 성공을 계속 거두리라고 낙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집권 2년째인 지난 94년 공화당의 중간 선거 압승으로 여소야대 상황에 직면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슬기로운 방향 조정을 했듯이 부시도 독주 자세를 재고해야 옳을 것이라고 보는 평론가들이 있다. 민의를 읽은 클린턴은 사회 복지 체제의 개혁과 재정 균형의 회복을 내세움으로써 민주당의 전통적인 진보적 이념에서 우선회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재선의 터전을 닦을 수 있었다.

제퍼즈 이변은 대외 자세에도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으며,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까지 이러한 변화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고루한 80세의 노 정객 제시 헬름스(노스 캐롤라이나)의원이 상원 외교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대신 국제주의자로 손꼽히는 조저프 바이든 (델라웨어)의원이 들어 앉게 되기 때문이다. 헬름스는 유엔과 군축을 크게 기피해온 인물이며, 어느 진보 성향의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심통이 사납고 고집 불통’으로 이름난 사람이다. 클린턴 시절에 국무장관이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여사가 헬름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사보려고 온갖 성의 표시를 다했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바이든의 등장이 부시 행정부의 외교 노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다 해도 헬름스 위원장이 퇴장한 영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민주당 인사들이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상원 법사위원장의 교체로, 대법원 판사등 사법부 인사에서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보수파 판사들의 등용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의원 한 사람의 변신으로 상원의 판세가 바뀌는 이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수용하며 적응해나간다는 것이 다 성숙한 민주주의의 단면이 아닌가 싶다.

<워싱턴= 진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