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정지상태가 차라리 행복합니다.

지하의 함석헌선생님께 이 글월을 드립니다. 그동안 당신을 잊어버린채 살아왔습니다. 잊어버린채 살아온 것을 뉘우칠 만한 겨를도 없이 세월의 풍속(風速)가운데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요즘에야 함석헌선생 탄신100주년 기념축전이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기에 저도 새삼스레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1983년 5월 수유리 안병무교수네 집 뜰에서 저는 뒤늦게 신랑이 되어 주역의 몇줄을 풀이하는 당신의 주례사를 들었지요. 그때의 사진첩을 보며 자욱한 감회가 일어났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이의 함석헌론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말합니다. 어떤 이는 씨？猿瀯瓚막？말하고 광야의 예언자로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저 지혜의 말 그대로 동과 서는 더이상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범세계적 과업속에서 고대인도의 베다와 구약세계를 한 눈으로 읽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당신이야말로 걱정하는 사람의 운명으로 이 세상에 왔던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살아계신다면 생전의 당신 이상으로 땅이 꺼진다고 걱정하고 걱정하다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너무나 전환의 때임에도 제대로 전환되지 못하는 시대의 정체를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시내가 막혀 늪이 되고 있습니다.

저 70년대 이래 민주화와 분단 청산의 여러 운동에서 항상 하얀 수염, 하얀 두루마기, 하얀 고무신의 당신 모습 뒤에는 제 친구들과 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신념은 꽃처럼 붉었고 순정은 숫총각 같았습니다. 그 암담한 날들을 분노 없이 살수 있었습니다.

어느 때는 그 항거의 의지 자체가 고착되어 하나의 감옥이 되기까지 한 적도 있지요.

그 아픈 계절을 살아오면서 감당해야 했던 시련들이 도리어 영광스러웠던것은 반드시 현실의 모순구조를 타파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생동(生動)을 실현해야한다는 숨찬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그간 유신체제와 ‘광주’ 그리고 5공,6공을 거쳐 문민 또는 국민의 시대에 이르는 동안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라는 본격적인 힐문(詰問)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이런 때야말로 당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들’정신과 네거리의 혼은 지금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삭제당하면서도 늘 말씀을 썼고 재갈이 물리면서도 말씀의 성대는 울리며 카랑카랑했던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한국사회는 오늘따라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얼굴입니다. 사회의 여러 구역 각자가 만들어낸 에고이즘 갑옷을 입은 농성체제들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지리멸렬입니다.

그 통합의 가능성은 아직은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 차라리 분단시대 이전의 식민지 시대를 견디어오고 오만·절망속에 있던 피압박민족의 통합정서가 그리워 지기까지 합니다.

몇천년동안 오순도순 쌓아도 모자랄 조상 대대의 땅 위에서 갈라진 남북은 고사하고 갈라진채 동서로 짝 찢어져 서로 등때기를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통합 또는 통일이라는 최고의 가치 그 절실성보다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몇갑절입니다.

또한 거대한 역사가 진행되어 마땅한 새 천년, 새 세기가 열렸음에도 우리 정치는 역사발전의 형식 대신 역사 정체의 낡은 도구로 되었습니다. 그 정치적 재앙은 고스란히 국민의 것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군사문화를 지나서 문민과 국민의 정부가 이어져온것만 그 정치의 실천 목표가 되어야 할 개혁은 점차 역행의 길로 돌아서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이 땅은 정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가장 저질의 정치인 것입니다. 이따금 여의도를 지나가면서 석굴암 돔을 흉내낸 가장 못생긴 국회의사당을 철거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함석헌선생님. 제 가슴속에 새겨진 당신의 시적(詩的)인 풍모를 내세우면서 당신이 이 땅을 걱정하듯 우리 모두 강력하게 걱정해야 하며 우리 모두 추악한 정치를 당장 몰아내고 높은 문화를 요청해야겠습니다.

<고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