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 선생이 말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명제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그 시사하는 뜻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시의 정치상황은 자유당 정권과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를 빙자한 전횡과 독재가 판을 치고 있었고, 전후의 폐허 속에서 국민들이 극도의 빈궁과 좌절을 겪을 때였다. 인간적 존엄이나 정의감보다는 한 끼의 식량과 날품팔이의 일자리와 같은 물질적 가치가 더 절실했던 상황이었지만, 함석헌 선생이 부르짖은 이와 같은 정신적 가치가 지닌 뜻, 즉‘생각’이 내포하고 있는 불의에 대한 항거의 정신을 국민들은 너나없이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4월혁명이요 반군사독재 투쟁이었다.

요즘의 나라꼴을 보면서 새삼 함석헌 선생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는 의도는 분명하다. 문민정부니 국민의정부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명찰을 달고서 온간 사술(邪術)로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아 종당에는 이 나라의 ‘국민’된 것을 치욕스럽게 만드는 정치판의 모습을 보면서 한평생 국민들에게 존경받았던 함석헌 선생의 목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 꾸짖고 종아리를 때리는 원로가 없는 세상은 적막하다.

얼마 전까지 여당 대표를 하던 분이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 원로의 경륜이 절실한 지금 그분이 지닌 지도력에 흠을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전임 총재를 북측의 정치적 공세에 밀려 외국으로 피신시켰다가 우여곡절끝에 북측의 요구대로 사임시킨 직후여서, 아마도 그 옛날 함석헌 선생을 흠모했을 신임 적십자사 총재에 대한 감회가 유별날 수밖에 없다.

친정으로 돌아온 기분이며 다시는 정치판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게 그분의 취임소감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래도 국민들로부터 그 나름의 존경을 받아온 분이 이렇게 무책임한 소리를 해도 되는 것일까. 여당의원들이 국회의장을 공관에 연금시키는 맹랑한 짓도 마다하지 않고 또 수백·수천억원의 불법대출사건이 터져 금융기관이 거덜이 났는데도 몸담았던 여당의 책임에 대하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배려차원에서 마련되는 자리를 찾아서 이리저리 그네를 타는 원로들의 끝없는 현역정신은 어쩌면 의욕과 패기가 있는 진짜 현역들의 가슴을 멍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

최근 민주당 의원 셋이 자민련으로 이적하는 웃지 못할 희극이 일어났다. 차라리 공조를 할 생각이면 아예 민주당 의원을 수십명 뚝 떼어서 자민련에 입당시켜 양당의 의석수를 동등하게 했더라면 배꼽잡고 실컷 웃을 수 있는 진짜 희극이나 되지 않았을까. 그러면 글자 그대로 대등하게 서로 돕는 공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공조라는 말이 남북교류의 큰 바탕이기도 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집권당이 생각하는 공조의 실상도 기껏 이런 해괴망측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겨우 이렇게 죽을 꾀밖에 못내는 사람들이 남북관계를 전담하고 있으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해괴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이 든다.

대통령은 이번 사태가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했다. 또 신임 여당 대표는 이번 일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살신성인은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는 것이다. 옳은 일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을 일컫는 최고의 가치를 지칭하는 말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은 결코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말 아닌가. 이처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뻔한 일을 오직 한 사람 강창희 의원만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위안이라도 삼아야 하는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날 군사독재정권에 의하여 도쿄(東京)에서 납치되었다가 생명을 건지고 퍼렇게 멍이 든 얼굴로 국민 앞에 나타나서 흘린 눈물과, 그리고 대선에서 패한 다음 정계를 은퇴하면서 흘렸던 눈물은 온 국민의 눈물이었고 암울한 시대를 견디게 한 힘의 원동력이었다. 조국의 미래와 민주주의를 생각하면서 흘렸던 그 눈물이 이제 비웃음이나 쓴웃음으로 변한 까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 큰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권부가 등돌린 민심을 다시 얻고 싶다면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생각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오탁번 시인·고려대 교수>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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