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지인들과의 저녁 자리에 ‘선관위 계약직’으로 일한다는 한 여성과 동석한 적이 있다. 재기발랄했던 그는 직장 상사들 험담을 한참 동안 쏟아냈는데 주로 선관위 직원들의 ‘끼리끼리’ 조직 문화와 나이를 막론한 ‘꼰대질’에 관한 얘기였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사람들은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요.”
최근 선관위 채용 비리 사건을 다루면서 그 한마디가 머리를 스쳤다. 특혜 채용에 관여했던 선관위 직원은 감사원 조사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뽑기 위해 친인척을 채용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했다. “선관위는 가족 회사”라는 발언도 나왔다. 비리가 적발돼 조사받는 처지에 이런 황당한 말을 해명이라고 한 것이다. 선관위는 2023년 채용 비리 논란 당시 고위직 자녀 5명을 직무 배제했다가 반년 만에 슬그머니 업무 복귀 조치를 해 놓고 “선거를 앞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혜택이라는 지적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뭐가 잘못인지 알았다면 하기 힘든 말들이다.
선관위 공무원들은 선거 때가 되면 휴직을 했더라도 복귀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선거철마다 무더기로 휴직한다. 선관위는 이런 휴직자 급증을 지방 공무원 경력 채용을 위한 핑계로 삼았다. 선관위 공무원들은 이 자리에 지방 공무원인 자녀를 깨알같이 뽑아 넣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리와 기강 해이는 아마 여기가 끝이 아닐 것이다. 선관위는 영국 버킹엄궁전, 이탈리아 콜로세움 등 관광지를 도는 국외 연수 프로그램이 논란이 될 때마다 반짝 ‘시정’을 다짐하곤 비판이 잦아들면 버젓이 다시 관광지를 돌았다. 2023년엔 몰디브와 코타키나발루, 지난해엔 영국·미국·캐나다에 다녀왔다. 정치권 관계자는 선관위 국외 출장에 대해 “선거철 고생한 직원들에 대한 포상 성격이 짙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62년간 348명에서 3000명 규모로 인원이 늘었는데도 틈날 때마다 조직 확대를 모색해왔다. 건물을 짓는 데만 300억 원이 투입되는 선거박물관이 대표적이다. 선관위는 2023년 선거박물관 건립을 위한 보고서에 총 28명의 운영 인력이 필요하다고 썼는데, 퇴직 공무원 임용 창구가 될 수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2013년에는 일반 시민에게 체계적인 선거교육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선거정치교육원’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기존 선거연수원 인원과 예산을 늘리고 원장직도 차관급 정무직으로 승격하는 전형적인 몸집 불리기 방안이다.
오늘날 선관위는 공공연한 채용 비리, 근무 태만에도 이를 바로잡을 자정 능력까지 상실한 조직이 됐다. 성역 안에서 키워온 ‘우리’에 대한 관대함이 고도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헌법기관의 도덕 관념을 수십 년간 갉아먹어 온 것이다. 앞으로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선관위원장은 고개를 숙이겠지만, 조직의 고질병은 낫지 않을 것이다. 선관위가 제시한 외부 인사 주도의 한시적 특별위원회도 비난 여론을 피하기 위한 미봉책일 가능성이 크다. 감사원이 헌법기관인 선관위를 직무 감찰할 수 없다면 국회가 이를 감시하고 견제할 책임이 있다. 여야는 국정조사·국정감사를 뛰어넘는 외부 감시 장치를 마련해 선관위 통제를 제도화해야 한다.
김윤희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