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국 최종현학술원 원장이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고등교육재단 빌딩 앞, 책을 쌓아놓은 형태의 조형물에 기댄 채 학술원 설립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박인국 ‘최종현학술원’ 초대 원장
1978년에 SK 장학생 됐지만
고시합격 하면서 유학 포기해
외교정책실장·유엔대사 등 역임
2011년 교육재단 총장으로 컴백
中 부상·AI·포퓰리즘·북핵 등
동북아 4가지 심각한 위기 직면
美·北 하노이회담 결렬됐지만
서로의 속 확실하게 짚은 계기
어떤 형태로든 협상 재개될 것
지난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생전에 인재 양성을 중시했던 부친 최종현 선대회장의 20주기를 맞아, 선대회장의 이름을 딴 학술원을 만들었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최종현학술원’의 초대 원장은 박인국(68) 전 유엔 대사가 맡았다. 박 원장을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고등교육재단 빌딩에서 만났다.
부산 출신으로 경남고, 서울대 중문학과를 나온 박 원장은 1978년 제12회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공직생활 동안 박 원장은 외무부 군축원자력과장, 대통령 국제안보비서관, 주쿠웨이트 대사,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장, 다자외교실장, 주유엔 대사, 유엔 평화군축위원회 부의장,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그런데 현재는 대기업 SK의 선대회장 이름이 붙은 학술원을 이끌고 있다. 어떻게 SK와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했다.
“외교부에 들어가기 직전에, 선대회장이 만든 한국고등교육재단 3기 해외유학 장학생 후보가 됐습니다. 1978년이었죠. 재단 동기가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이에요. 염 전 총장은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갔고, 저는 외무고시에 합격해 유학을 포기했죠. 2011년에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33년 만에 재단에 ‘컴백’했네요.”
고등교육재단 초기에 미국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데 집중했다면, 1998년 최태원 회장이 이사장을 맡은 뒤로는 아시아 학술 교류로 영역을 확장했다. 우선 베이징(北京)대, 푸단(復旦)대, 런민(人民)대, 저장(浙江)대 등 10여 개 대학에 포럼을 만들었다. 또 중국, 몽골,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등에 총 18개의 아시아 리서치 센터를 설립했다. 이와 함께 아시아 학자들을 매년 50∼60명씩 초청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와 1년가량 체류하며 연구한 아시아학자가 지난해까지 913명에 이른다. 친한파 학자들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등교육재단이 꾸준히 성장해 왔는데 왜 학술원을 새로 만들었을까.
“한국뿐 아니라 동북아가 크게 4가지의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위기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키워놓은 인재들이 집단지성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상황을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이 필요했습니다. 프린스턴에 기반을 둔 ‘Institute for Advanced Study(IAS)’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최고 학자를 불러모아 몇 배의 봉급을 주고, 아무런 부담을 안 주고 자유롭게 생각하도록 합니다. 선대회장은 우리도 저런 걸 한 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74년 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해 사비를 털어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이후 45년 동안 박사학위자를 750명 배출했고 박사과정 재학자도 205명입니다. 노벨상 후보가 될 만한 과학자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버드대 박홍근·함돈희 교수, 예일대 천명우·이대열 교수 등이 있습니다. 천 교수는 예일대에서 학부 학장이 됐는데, 동양계로는 처음입니다. 또 스탠퍼드대 이진형 교수, 시카고대 박지웅 교수 등은 4∼5년, 늦어도 10년 내에 후보군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국내에는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 같은 분이 있고요. 이렇게 기반이 갖춰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IAS를 모델로 학술원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중국의 부상(浮上)’ 시대를 ‘아시아의 부상’ 시대로 발전시키는 데 한국의 창조적 역할을 확장해 보자는 취지에서 학술원을 설립하게 됐습니다.”
곧바로 최종현학술원이 분석한 ‘4대 위기’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박 원장은 4가지 위기가 이제는 ‘뉴노멀(New Normal)’이 됐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뉴노멀은 중국의 부상이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거치고, 남중국해 분쟁이 본격화된 201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중국이 굉장히 공격적으로 변했습니다. 최근 들어 과학기술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여러 분야에서 중국과 미국이 갈등구조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시진핑(習近平) 주석 체제가 들어선 뒤, 미국에서 많은 사람이 ‘중국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힘들다’는 현실주의 시각으로 변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뉴노멀로는 ‘과학 혁신(Scientific Innovation)’과 포퓰리즘을 각각 꼽았다.
“지난 5∼10년 동안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기술 진보가 이뤄지면서 인류가 완전히 새로운 문명의 변곡점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기술 업그레이드에만 관심이 있고, 그게 어떤 위험을 갖는지, 다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우리 같은 부문에서 경고를 해줘야 하는 겁니다. 3번째 뉴노멀은 포퓰리즘의 등장입니다. 제가 2009∼2010년 경제·금융·개발·환경 분야를 다루는 유엔총회 제2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그때 위원회의 연구 결론이 ‘취약한 자들이 가장 세게 얻어맞는다’(The vulnerable are hit the hardest)였습니다. 중산층과 하류층이 몰락하니 시스템이 통째로 흔들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호무역주의가 힘을 얻고, 반세계화 현상의 등장 속에 포퓰리즘이 나옵니다. 문제는 포퓰리즘이 꼭 폭력적인 현상을 동반한다는 겁니다.”
마지막 네 번째 뉴노멀은 역시 북핵 위기였다.
“중국은 2009년 ‘한반도 비핵화보다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데 우선을 둔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게 북한에 나쁜 시그널을 줬을 수 있습니다. 또 미국은 소위 전략적 침묵을 택했는데, 실제로는 그게 ‘노 액션(No Action)’이거든요. 그러니 북한이 ‘센스 오브 임퓨니티(Sense of Impunity)’를 갖게 된 겁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벌을 안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지난 10년 동안 북핵이 국제사회의 최우선 순위에서 밀려나면서, 북한은 천금 같은 시간을 벌었습니다. 북핵 문제를 다시 최우선 순위로 올린 것은 분명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입니다. 북핵 위기 관리 시나리오가 완전히 실패하면 우리나라, 일본, 심지어 대만에서도 핵무장에 대한 요구가 거세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국에 가장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미·중 관계가 안 좋더라도 중국이 북핵 이슈에 관해서만은 협조할 것으로 봅니다.”
결렬로 끝난 지난달 27∼28일 미·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톱다운 방식은 화끈해서 좋은데, 교착상태에 딱 빠지면 신(神) 외에는 돌파구를 열 수가 없어요. 중재할 사람이 없으니까. 1986년 10월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톱다운 방식 정상회담을 했다가 결렬된 전례가 있습니다. 최악의 정상회담이란 소리를 들었는데, 이듬해 12월 중거리핵전략조약이 체결되면서 레이캬비크 회담이 재평가를 받았습니다. 하노이 회담도 이번엔 결렬됐지만, 오히려 서로의 속을 확실하게 짚을 수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진지한 새 협상의 기초가 될 수 있고요. 어떤 형태로든 협상은 재개되지 않을까 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노력이 상당한 성과를 거둘 기회는 있다고 봅니다.”
박 원장은 단 미국 조야(朝野)에 만연해 있는 북한에 대한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싱크탱크나 관료들 사이에 북한에 대해 철두철미한 불신이 있습니다. 1993년 12월 베나지르 부토 당시 파키스탄 총리가 방북했는데, 그때 농축우라늄 시설과 관련된 정보를 담은 CD와 북한 미사일 기술 청사진을 교환했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부토 전 총리가 나중에 뉴욕타임스와 가디언에 고백했습니다. 1993년 12월이면 한창 북한과 미국 사이에 1차 핵위기 타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입니다. 이어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미·북 합의가 이뤄졌는데, 핵심은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흑연감속로와 재처리시설을 동결한다는 것이었죠. 플루토늄을 동결하겠다고 미국과 협상하면서 속으로는 파키스탄과 농축우라늄 관련 구체적 정보를 교환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미국 조야가 확 뒤집어졌죠. 미국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기본적으로 북한의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박 원장은 1990년대 중반 외교부 군축원자력과장, 대북경수로지원단 국제협력부장을 지냈다.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외교안보 담당자들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북한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이에 ‘특권면제 및 영사보호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했는데 이 의정서가 북한 법을 적용받느냐, 아니냐에 관한 것입니다. 북한이 극도로 반발했지만, 이 프로젝트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대부분인 KEDO 멤버에 대해 100% 신원 안전보장이 이뤄져야 한다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북한 법률과 관습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북한을 국제사회에 편입시켜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너무 급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인내를 갖고 할 말을 충분히 하면서 설득해 가야 합니다. 북한이 하자는 대로만 너무 해주면 프로젝트 자체가 깨져버립니다.”
김성훈 기자 tar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