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상대방과 얘기할 때 흔히 “(무엇무엇이) 있거든요…”라는 말을 앞세운다.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들어간다. 상대방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응대한다. 속으로는 “그래 너 잘났구나… 어디 한번 해봐”라고 코웃음을 친다. 이어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기보다 자기가 무슨말을할까만을 골똘히 생각한다. 노래방에서 상대방의 노래는 듣지 않고 자기가 부를 노래만을 열심히 찾듯이. 대화의 역동성은 사라지고 심각한 소통장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그릇된 우월감은 자신을 제대로 성찰할 수 없게 만든다. 한국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점’이라는 굴종의 경험에 치를 떨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인가. 20세기 후반을 거쳐 21세기로 진입하면서 폭발적 경제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뒤 한국인들은 어디에서고 우쭐대고 싶어한다.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우월주의가 대표적이다. 이미 세계 초강대국이 돼 버린 일본을우습게 보는 것은 남한과 북한밖에 없다는 얘기도 있다.
이 책은 우월주의와 근거없는 낙관주의, 감정우선주의, 이중규범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등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거침없이 무너뜨린다. 한국인의 병폐를 성역없이 들춰낸 박노자 오슬로국립대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이어 오랜만에 나온 비판적 한국인론이다. 무척 논쟁적이다. 곳곳에 뇌관이 묻혀 있다. 굿의 지역 공동체적 정감 회복이라는 의미가 부각되는 상황인데 무교(巫敎)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최근 네트워크 사회가 진전될수록 심해지는 개인주의, 파편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하지만 이 책은 개인을 인정하는 개인존중사상과 개인주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초청연구원으로 지난 2002년 이후 두번째 파리 생활을 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유학생 신분으로 머물렀었다. 집을 나온 뒤에야 기존 관습에 젖지 않고 집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볼 수 있다. 저자는 파리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나 거리를 배회하면서 한국사회의 종교와 문화, 교육, 의식구조 등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곱씹어본 듯하다.
저자는 545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방대한 담론을 풀어놓기 전에 우선‘한국사회의 문화적 문법’에 딴죽을 걸겠다고 선언한다. 문화적 문법을 사회구성원들의 행위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사고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영어문법을 모르면 무시당하듯 여러번 문화적 문법을 어기면 ‘상대하지 못할 사람’이 되고, 계속 어기면 ‘미친 사람’이 돼 버린다는 것.
저자는 “한국은 경제적으로 세계 10대 교역국가가 됐고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기존의 전통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를 한 경험은 빈곤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먼저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 등 6가지 근본적 문법으로 정리했다. 이어 파생적 문법은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주의 6가지로 분류한다. 이 12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한국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점으로 분출된다.
저자가 예로 들었던 황우석 사태에서부터 신정아 학력위조 파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대학사회에서도 윤리적 불감증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할 때도 이 같은 요소들은 유용한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는 무슨 일이 터지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 재발을 막는 근본적 방법보다는 공적 자리에 있는 책임자를 찾아내 그를 사퇴시키거나 법적 책임을 묻는 일로 마무리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특히 종교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도교, 불교, 기독교 등 외래종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교와 결합함으로써만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사회의 기저에 무교 - 유교 결합체를 근간으로 하는 문화적 문법이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다. 나쁜 일을 피하고 현실에서 복을 바라는 무교는 현세적 물질주의를 강화시켰다. 무교의 조화론은 갈등회피주의라는 문화적 문법의 뿌리다. 또 무교의 현세주의적 세계관이나 조화론은 이후 도래한 불교와 기독교에도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한국 기독교에서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가족이기주의와 연고주의는 유교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이 책에 따르면 유교도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권력과 질서의 유지, 국민동원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됐다. 개인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시됐고 이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논리로 정당화됐다. 또 한국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개인주의 = 자기만의 이익추구 = 무질서 = 무정부주의 = 혼란 = 난장판’이라는 등식이 자리잡고 있다.
저자는 이제 한국사회는 권위주의를 해체하면서 수직적 인간관계를 수평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정치 중심의 사회운동도 문화중심의 사회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밝혔다. 문화예술분야의 역할강화, 가족관계와 종교단체, 학교 교실의 민주화 등과 함께 영성훈련, 문화체험, 자원봉사, 우정과 연대의 발견, 독서토론 등을 통해 개인 내부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낡은 문화적 문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뇌관이 개인주의에 있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은 주체성과 자주성과 독자성을 갖춘 개인을 뜻한다.
저자는 “개인존중사상이 없는 한 나이와 성별, 출신가문과 출신학교, 지역을 기준으로 한 서열의식과 권위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한 공동체 논리 앞에 개인을 줄 세우는 오래된 문법은 계속 통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