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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영웅시대 개막

  • 입력 2000-08-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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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에펠탑에서 동남쪽 앙발리드궁으로 가자면 드넓은 공원을 지나야 한다. 넓고 손질이 잘 된 공원을 지나는데도 땅의 기운과 이름의 기운에 민감한 이 한국인 마음은 더없이 불편하다. 공원 이름이 ‘마르스 공원’인 것이 마음에 걸린다.

‘마르스’가 무엇인가? 로마의 전쟁신인 바로 그 마르스가 아닌가? 그리스에서는 ‘아레스’로 불리던, 두 아들 ‘포보스’(공포)와 ‘데이모스’(걱정)를 데리고 다니던 무법자 아니던가. 실제로 마르스 공원에는 전쟁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황금색 돔을 번쩍이는 앙발리드궁은 지금 전쟁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마르스 광장에 서면, 여기에서 직선으로 이어지는 ‘라 데팡스’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파리 외곽의 신도시가 되어 있는 ‘라 데팡스’는 프랑스의 국방 및 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르스 광장에서의 불편한 심기는 우리 무의식을 흐르는, 병인양요(丙寅洋療)의 집단 무의식적 상흔과 어떻게 무관할 수 있을까. 우리 문화재 외규장각 도서를 보관하고 있는 나라에서.

공원을 거의 벗어나자, 거대한 미색 건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름다운 건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식하게 투박한 건물도 아니다. 굳게 잠긴 대문에는 청동으로 만든, 무시무시한 ‘메두사의 머리’장식이 붙어 있다. 마르스, 앙발리드, 라 데팡스, 그리고 ‘메두사의 머리’….

'메두사의 머리'친 神人 페르세우스


“저 건물은요….”

파리를 잘 아는 동행이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말 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잠깐…. 설명하지마, 내가 설명해볼 테니까.”

“해보세요, 그럼.”

“사관학교 아닐까.”

“정확하게는 ‘군사학교(Ecole Militaire)’. 그렇거니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면 사관학교인가요.”

佛 군사학교 정문에 걸린 '蛇髮귀신'사연


메두사의 머리는 아무데나 거는 것이 아니다. 메두사는 머리카락 올 하나하나가 뱀으로 되어 있는 사발귀신(蛇髮鬼神)이다. 모습이 어찌나 무서운지, 어쩌다 얼굴 보게 되는 사람은 괄약근이 확 풀리면서 생똥을 싸고 온몸이 굳어지면서 돌이 되고 만다. 메두사의 목을 자른 영웅은 페르세우스다.

그렇다면 페르세우스는 어떻게 돌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는가. 의로운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방패를 빌려갔기 때문, 오직 그 방패에 희미하게 비치는 메두사의 모습만 보았기 때문이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 여신의 방패에다 달아주었다.



이렇게 해서 여신의 방패는 무적 방패의 상징이 되고 메두사의 머리는 곧 방패의 상징이 된다. 그 방패를 본다는 것은 메두사의 머리를 보는 일이다. 메두사의 머리를 보면, 본 사람은 돌이 되고 만다. 우리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종사하는 군인들을 ‘조국의 방패’라고 하지 않는가.

이 방패가 바로 ‘아이기스(Aigis)’다. ‘아이기스 방패’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파리의 군사학교는 교문에다 이 ‘아이기스’를 건 것이지 단순히 메두사의 머리를 건 것이 아니다. 미국이 자랑하는 구축함,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축함, 군사 비밀이어서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우리나라도 구매를 검토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제 구축함 ‘이지스(Aigis)’는 ‘아이기스’의 영어식 발음이다.

고대 그리스가 빚어내고, 로마제국이 계승하고, 프랑스가 꽃을 피운 상징적 조형은 이렇게 해서, 언어가 서로 소통되기도 하고 두절되기도 하던, 까마득한 옛날과 오늘 사이를 가로지른다.

'진정한 영웅담'은 해피엔딩 아니다


기나긴 신들의 시대 이야기에 이어 영웅의 시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페르세우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가 바로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영웅이기 때문이고, 파리의 군사 학교 이야기로 영웅 이야기를 여는 것은 고대 영웅이, 조지프 캠벨의 말마따나, ‘사라진 것이 아니고, 다른 모습으로 뉴욕의 42번가 건널목에서 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캠벨이 미국인이어서 ‘뉴욕의 42번가’라고 한 것뿐이다. ‘서울의 광화문 네거리’여도 무방하다.

그리스의 ‘영웅(Heros)’은 우리가 아는 ‘영웅(hero)’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지혜와 무용이 뛰어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그리스 신화의 ‘영웅’은 우리의 ‘영웅’을 아우르면서도 ‘신들의 피붙이’라는 단서가 따라붙는다. 따라서 그리스의 영웅은 ‘신인(神人)’, 혹은 ‘신자(神子)’이기도 하다. 그리스인들인 신약성서의 복음서 기자(記者)들이 그리스도를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헤로스’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웅 이야기 혹은 ‘영웅 전설(Hero cycle)’에는 패턴이 있다. 영웅전설을 들으면, 언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웅 전설’의 경우 ‘전설’을 뜻하는 사이클(cycle)이 때로는 ‘순환주기’로 번역되기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웅은, 인간 세계의 남성이 아닌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권능의 지배자(신, 신의 권화 혹은 빛)에 의해 잉태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기는, 태어나서는 안될 아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린시절에 고난을 당한다(아기 그리스도, 아기 모세). 어린 영웅은 어느날 문득,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다(소년 홍길동). 우리는 부모로 행세하던 이가 사실은 도련님의 부모가 아니다, 라는 말로, 영웅이 어린 시절에 받은 고난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어린 영웅은 이제 길을 떠나야 한다. 스승을 만나, 천덕꾸러기 노릇으로 마음을 비우고, 이윽고 제자가 되어 무술을 닦으면, 스승은 더 가르칠 것이 없다면서 영웅에게 하산을 명한다. 이제 산 밑에서는 모진 시험이 그를 기다린다. 시험을 이기면 미녀를 얻을 수도 있고 나라를 얻을 수도 있다. 진정한 영웅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되지 않는다. 영웅에게는 두가지 길이 있다. 어제 영웅이 된 자가 오늘 순교하지 않으면 내일 폭군이 되어 거적말이 신세가 된다는 것, 이것이 영웅의 운명이다.

그리스 남부 아르고스 땅에 아크리시오스라는 왕이 살고 있었다. 아크리시오스에게는 ‘다나에’라고 하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딸이 혼기를 맞자 아크리시오스는 어떤 신랑감이 좋을가 싶어서, 델포이에 있는 무신(巫神)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 신탁(神託), 곧 신의 뜻을 한번 받아 보았다. 이렇게 나왔다.

"외손자 손에 목숨잃으리라" 섬뜩한 경고


‘그대는, 딸의 몸에서 태어나는 자식 손에 목숨을 잃게 되리라.’ 신화는 갈등에서 시작된다. 신화는 갈등을 하나씩 해소해 나가면서 넓어지고 깊어진다. 갈등이 하나씩 해소되면서 더 큰 갈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크리시오스가 앉아서 당하려고 했을리 없다. 그래서, 사내가 범할수 없도록 딸 다나에를 청동탑에다 가두었다. 하지만, 청동탑에 가둔다고 해서 다나에의 처녀성이 온전할 것으로 짐작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골키퍼는 ‘골인’의 영광을 다채롭게 하기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제우스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처녀가 아름다웠다. 둔갑의 도사 제우스는 황금 소나기가 되어 다나에의 무릎 사이를 파고들었다. 다나에의 ‘처녀수태(處女受胎)는 세계에 산재하는 처녀수태 설화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윤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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