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전쟁에 불확실성 가중
‘경제의 정치 종속화’도 가속
선심성 정책 속속 입법화 우려
尹 민생토론회 공약도 240개
‘건전재정’ 맞춰 재점검 필요
경청 통한 국정 재설계 나서야
미국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1921년 출간한 저서 ‘위험, 불확실성 그리고 이윤(Risk, Uncertainty and Profit)’에서 처음으로 ‘위험’과 ‘불확실성’의 개념을 분리했다. 산업화 이후 경제가 복잡해진 상황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위험’ 개념으로는 경제 예측성이 떨어진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나이트에 따르면 ‘위험’은 확률을 통해 점칠 수 있다면, ‘불확실성’은 정보 부재 등으로 미래 상황의 발생 가능성을 명확히 측정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논문이 나온 1921년은 역사적으로 ‘전간기(戰間期)’에 해당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채 가시지 않은, 하지만 그 누구도 1939년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나이트가 ‘불확실성’ 개념을 구분해낸 것은 탁월한 식견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현재, 우리는 또다시 ‘불확실성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2022년 2월 개시된 우크라이나 전쟁,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과 지난 13일 이란의 첫 이스라엘 본토 공격까지, 우리가 결코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과 변수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냉전 붕괴 이후 자유무역과 다자주의에 기반해 글로벌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세계화 역시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퇴조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국제질서는 아직 가시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지금 이 시기를 ‘전간기’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 세계 주요국의 1차 대응은 ‘각자도생’이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빨라진 이 흐름은 이제 정치·안보는 물론 경제에까지 깊숙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보호무역을 넘어 공급망 재편, 진영 간 경제블록 형성, 여기에 인공지능(AI) 등장까지 글로벌 경제는 ‘불확실성’투성이가 됐다. 정치·안보가 경제와 강하게 결합하는 이 같은 상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의 귀환이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당선된다면, 정치·안보 이슈에 경제가 쓸려 들어가는 현상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국내에서도 ‘4·10 총선’ 이후 경제·민생 사안이 급격하게 정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제의 정치 종속화’가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3년 뒤 대선을 겨냥한 선심용 정책이 쏟아지고,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정책의 입법화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여야가 이번 총선용으로 내놓은 공약만 봐도 이를 쉽게 점칠 수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여야의 총선용 개발공약만 2239개다. 소요 추정 예산도 최소 554조 원에 달하는데, 내년도 예산 심의가 시작되는 올 하반기부터 여야 간 격전은 불 보듯 뻔하다. 지난해 국가채무가 1127조 원으로 역대 최대이자, 국내총생산(GDP) 대비 첫 50%를 돌파한 상황에서 ‘빚잔치’가 우려되는 이유다.
이렇기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은 총선 참패를 겸허히 수용하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대내외적 환경을 엄중히 인식한 뒤 유사 사태에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자금을 마련해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24차례에 걸친 민생토론회에서 쏟아놓은 핵심 정책 240개를 전부 재점검해서 옥석부터 가려야 한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비효율적 공약은 과감히 정리하는 게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에도 들어맞는다. 집권 3년 차인 올해 국가채무도 GDP 대비 50%를 넘어서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래야만 윤석열 정부가 총선 패배에도 절대 놓지 말아야 할 노동·교육·연금 개혁과 함께 의료 개혁도 추진할 수 있는 정책적 룸이 생긴다.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는 불확실성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 “불확실성을 수용하고 변동성을 이용하라”. 윤 대통령 역시 총선 패배와 전쟁으로 각각 대표되는 대내외적 변화를 인정하고, 후반기 국정 운영 방향을 재설계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민생토론회 후속조치 점검회의에서 밝힌 “검토하겠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라”는 식의 일방적 지시가 아닌, 경험 있는 관료와 객관적 분석을 제공하는 전문가 의견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할 것이다.
신보영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