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운데)가 앙상블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지난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이정우 기자의 후룩후룩-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크레메라타 발티카 연주회
지나간(後) 공연을 돌이켜보고(look) 다음(後) 만남을 내다보자(look)는 의미의 리뷰. 공연을 놓쳐 아쉬운 마음은 책이나 음반 같은 물질로 달래봅니다.
지난 2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라트비아 출신의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는 ‘시대의 악사’였다. 그는 거리의 악사처럼 무엇이든 들려줬다. 다만 의도와 방식이 조금 달랐다. 크레머는 한 시대의 작곡가와 그가 속한 세계의 영혼이 담긴 음악의 숨결을 관객에게 불어넣었다. 현과 활만 있으면 무엇이든 들려줄 법한 크레머 덕분에 관객들은 생소했던 음악과 세계, 나와 다른 타자와 조우했다.
크레머와 그가 창단한 앙상블 크레메라타 발티카가 이날 연주한 곡들은 모두 발트 3국 출신 작곡가들의 작품. 그렇지만 결코 지역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세계가 담겨 있었다. 패르트의 ‘형제들’(Fratres)은 크레머의 스산한 바이올린 독주로 시작해 현악 앙상블이 겹쳐지며 점차 색채를 입기 시작했다. 그가 집중하면 가는 다리를 오므리며 양 무릎을 붙인 채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크레머 없이 크레메라타 발티카만 나선 ‘나무’(Lignum)에선 제1바이올린이 찢어질 듯한 고음을 내고, 제2바이올린이 현을 뚱기며 빗방울을 표현하는 가운데, 첼로가 안정감 있는 멜로디 라인을 이끌었다. 거친 비바람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처럼. 바이올린 활로 스산한 바람 소리를 표현하는 등 악기 하나하나가 자연의 숨결을 표현했다. 크레머가 다시 등장해 함께 들려준 ‘한밤중의 리가’(Midnight in Riga)는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다. 라트비아 출신인 크레머가 인도하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꿈과 같은 밤 12시. 따스한 소리로 꿈속 연회장으로 관객을 인도했던 바이올린은 이내 끼익끼익 유리창을 닦는 듯한 긁힌 음을 통해 서늘한 현실로 관객을 끌고 왔다. 영롱한 실로폰 소리와 바이올린을 활대로 탁탁 두드리는 소리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됐다.
크레머의 바이올린은 버나드 허먼의 ‘싸이코’식 쇠 긁는 날카로운 소리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소리를 오갔다. 바이올린은 가장 바로크적이면서 가장 현대적 악기란 깨달음.
2부 시작인 ‘또 하나의 겨울나그네’는 현대 음악가 5인의 슈베르트 음악에 대한 성찰이자 헌사였다. 특히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출신 데샤트니코프의 ‘거리의 노악사’는 무대 위 백발의 크레머와 겹치며 울림을 줬다. 더블베이스의 압도적 저음과 실로폰의 영롱한 음색 사이로 크레머의 바이올린은 꼿꼿이 자신의 길을 가며 어우러졌다. 어떠한 시련이 와도 이 자리에 서서 음악을 들려주겠다는 태도, 그리고 관객에게 반드시 그 음악의 영혼이 닿아야 한다는 책임감.
앙코르 첫 곡으로 피아졸라의 탱고 리듬을 들려준 뒤, 크레머가 마이크를 잡았다. “전쟁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그 국민에게 이 음악을 바칩니다.” 이어 들려준 우크라이나 작곡가 미로슬라프 스코릭의 ‘멜로디’가 끝나자 대다수 관중은 기립했다. 훌륭한 연주에 훌륭한 음악,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덩달아 조금은 훌륭해진 기분.
[제 점수는요]
익숙지수 ★
달인지수 ★★★★★
박애지수 ★★★★★
만족지수 ★★★★★
[추천 음반:기돈 크레머-‘새로운 사계’]
필립 글래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여덟 악장으로 미국의 사계절을 표현한다. 기돈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새로운 작품의 위대함을 다양한 음색과 표현으로 조명한다.
이정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