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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박경일기자의 여행

옥빛 호수에 안개 드리우면… ‘몽환의 섬’ 가을색 짙어지네

박경일 전임 기자
박경일 전임 기자
  • 입력 2023-09-2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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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미지 크게보기 일출 무렵의 옥정호 풍경. 수면 위로 피어오른 물안개가 산자락에 구름으로 걸렸다. 가을날 이른 아침에 옥정호에 가면 높은 확률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옥정호 가운데 떠 있는 섬이 붕어섬이라고도 부르는 외앗날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임실 ‘옥정호’ 지금이 제철

▶ 섬진강댐이 만든 ‘옥정호’
자두모양 능선 ‘붕어섬’ 주변엔
새벽 물안개·수면 위 윤슬 장관

▶ 가을 호수 정취 100% 즐기기
두 발로는 출렁다리·물안개길
차로는 749번 지방도 드라이브

▶ 그리운 배우 ‘장진영 기념관’
부친 장길남씨가 조성해 운영
옷·수첩 등 생전 물건들 전시

▶ ‘남양수시’를 아시나요
남양 홍씨가 인조에 진상한 감
40년전 150그루→5그루 남아


임실=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섬진강댐으로 만든 호수는 왜 ‘섬진호’가 아닐까.

다목적댐을 막아서 만들어진 호수는 보통 댐의 이름을 따르는 법. 소양강댐을 막아 만든 호수가 소양호이고, 충주댐을 막아 만든 호수는 충주호다. 마찬가지로 청평댐이 막은 물을 청평호, 의암댐이 막은 물을 의암호라 부른다. 그런데 여기는 다르다. 섬진강을 막아 만든 호수는 ‘옥정호’다. 왜 그럴까. 모든 이름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임실 강진면과 정읍 산내면 사이로 흐르는 강의 좁은 목을 막아 지은 섬진강댐은 1965년에 완공됐다. 국내 최초의 다목적댐이었으니 당시에는 국가 차원의 자랑스러운 토목사업이었다. 그해 12월 열린 준공식에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까지 참석했을 정도였다. 당시 섬진강댐이 가둔 호수는 ‘섬진호’가 아니라 ‘운암호’였다. 왜 그랬을까.

이유인즉 이렇다. 지금의 섬진강댐 위쪽에는 일제강점기이던 1928년에 만들어진 농업용 댐 ‘운암댐’이 있었다. 운암이란 이름은 면(面)의 지명을 딴 것. 댐으로 가둔 수면적 대부분이 임실군 운암면에 속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랬으니 댐이 만든 호수의 이름도 당연히 ‘운암호’가 됐다. 운암댐은, 그 아래쪽에 댐 높이를 두 배쯤으로 높여 물그릇을 키운 섬진강댐이 지어지면서 수몰됐다. 댐은 수몰돼 사라졌지만, 새로운 댐이 생기고 나서도 호수 이름이 그대로 남았다. 섬진강댐이 만든 호수가 운암호였던 이유다.

# 일개 ‘리(里)’의 지명이 호수 이름이 되다

섬진강댐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운암호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이름인데, 그것 말고 다른 걸로 찾아보라”고 했다. 최신 토목기술로 다목적댐을 지어놓고 일제강점기 때의 호수 이름을 고수하는 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통령의 추상같은 지시를 받고 놀라서 부랴부랴 찾아낸 다른 이름이 ‘옥정(玉井)호’였다. ‘옥정’은 섬진강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 이름이었다.

사실 가장 간명하고 직관적인 이름은 ‘섬진호’였을 것이지만, 짐작해 보면 대통령 지시까지 받아 다시 짓는 이름으로는, 성의가 없어 보일 여지가 없지 않았을 테다. 옥정이란 이름을 찾아낸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옥정이란 지명은 마을에 ‘옥같이 맑은 샘’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지나는 도인(道人)이 훗날 이곳이 옥빛 물에 잠길 것이란 예언에 따라 붙인 지명’이라는 윤색 흔적이 역력한,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도 있다.

아무튼 댐 완공으로 만들어진 호수에다 수몰된 마을 이름을 붙인 건 유례가 없다. 면(面)도 아닌, 리(里) 단위 지명을 말이다. 수몰 마을을 기억하거나 존중하고자 했던 뜻은 절대 아니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냥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호수 이름이 된 옥정리는 섬진강댐 건설로 물에 잠겼지만 마을은 수몰 한계선 뒤로 물러난 자리로 옮겨가서 여태 살아남았다. 섬진강댐 담수로 물에 잠긴 마을만 18개. 수몰민은 자그마치 1만9851명이나 됐다. 이들 수몰민은 정부의 이주 정책에 따라 계화도 간척지로, 안산 반월 폐염전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옥정리는 그나마 다행인 경우였다. 댐 건설로 만경평야 일대는 풍요의 땅이 됐지만, 댐 주변 주민들은 물에 잠긴 고향 땅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다.

# 다목적댐에 ‘여행’ 목적을 더하다

건설 당시 섬진강댐의 방점은 ‘다목적댐’에 찍혀 있었다. 다목적댐이 가진 다목적에는 홍수 조절, 농업용수 공급, 상수원 확보, 전기 발전 등이 들어간다. 그런데 섬진강댐에 또 하나의 목적을 추가해도 좋겠다. 바로 ‘경관’이다. 먹고살기 바쁜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섬진강댐이 가둔 옥정호의 경관은 빼어나다. 분지형의 내륙 첩첩한 산중에 물을 가뒀으니 주위 풍경이 수반 위의 수석처럼 펼쳐진다. 백련산 능선 산줄기의 낮은 능선은 물에 잠기고, 높은 지대는 물 밖으로 나와 섬이 돼서 떠올랐다.

그렇게 호반의 섬이 된 곳이 ‘붕어섬’이라고 불리는 외앗날이다. 외앗은 자두의 옛말인 ‘오얏’의 사투리. ‘날’은 산등성이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외앗날을 풀이하면 ‘자두 모양으로 떠오른 능선’이란 뜻이다. 외앗날은 옥정호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새벽이면 수면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물안개가 섬 주변에 떠다니는 풍경이 으뜸이다. 해가 뜨고 난 뒤 수면 위로 반짝거리는 윤슬도 훌륭하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호반의 국사봉전망대다. 산 위의 전망대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안개 자욱한 호수를 사진에 담으려 올라가는 촬영 명소다.

옥정호의 안개는 봄, 가을이 제철이다. 가장 안개가 근사한 때가 딱 지금쯤이다. 옥정호에는 화려한 꽃밭 정원으로 탈바꿈한 외앗날로 들어가는 출렁다리가 놓여 있고, 물안개가 피어나는 옥정호 호안에 바짝 붙어 이어지는 근사한 걷기 길인 ‘옥정호 물안개길’도 있다. 게다가 잦은 비로 옥정호의 수위가 그득 차올랐다. 1년 전에 옥정호 출렁다리를 놓은 뒤에 이어진 갈수기로 그동안에는 붕어섬 풍경이 볼품없었는데, 지금은 잦은 비로 수위가 차올라 근사한 호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대표적인 가을 여행지’ 목록에 옥정호의 이름을 올려야 하는 이유다.

옥정호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드라이브다.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가 옥정호를 끼고 이어지는 749번 지방도로. 이 길의 호수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옥정호가 보인다. ‘가장 운치 있는 드라이브 코스’를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749번 지방도로 마암초등학교를 지나 운암매운탕거리로 이어지는 샛길이다. 호반에 바짝 붙어 임실과 정읍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길은 근사한 카페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 추천할 만한 카페가 ‘애뜨락’이다. 카페와 호수 사이에 도로가 있지만, 카페가 들어선 언덕의 높이로 호수를 바짝 끌어당겼다. 개방감 넘치는 야외 자리도 좋고, 두 채의 한옥 건물의 실내도 운치 있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위 사진은 외앗날로 건너가는 옥정호 출렁다리. 지난해 이맘때 놓은 다리다. 아래는 서른일곱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배우 장진영의 묘. 기일인 지난 1일 즈음에 누군가 놓고 간 듯한 꽃다발이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 서른일곱에 요절한 배우를 기리는 곳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옥정호에서 가까운 임실 운암면에는 ‘장진영 기념관’이 있다. 암 투병 끝에 서른일곱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배우 장진영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장진영의 묘가 있는 선산 아래 지은 기념관은 두 개 동(棟)으로 제법 규모가 있다. 기념관은 딸의 죽음이 못내 원통했던 아버지 장길남(88) 씨가 지은 것이다. 장 씨는 11억5000만 원의 출자금을 내서 딸의 이름을 내건 장학재단도 운영해 오고 있다. 따로 임실군 장학회에도, 전북대에도 딸의 이름으로 각각 1억 원을 기부했다.

이른 새벽 아버지 장 씨가 땀으로 등이 흠뻑 젖은 채 기념관 마당을 쓸고 있었다. 전주에 사는데 그날따라 불현듯 딸 생각이 나서 경차를 손수 운전해 왔다고 했다. 기념관을 찾아왔다고 하자 장 씨는 ‘고맙다’며 전시관 문을 열어줬다. 마침 장진영의 14주기 기일인 9월 1일 즈음이었다. 해마다 찾는 이들이 줄어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딸이 잊히는 게 아버지는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장진영이 생전에 가졌던 것들이 있다. 사진이 있고, 트로피가 있고, 구두와 옷이 있다. 여권과 트렁크, 여행 책도 있다. 생전에 여행을 좋아했던지 수첩에는 제주의 맛집과 ‘다시 가고 싶은 리조트’ 목록이 빼곡했다. 일상의 물건에서 배우의 체온이 느껴져서 그런지, 짧았던 삶이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실은 이런 것보다 더 가슴 뭉클했던 건 전시관 곳곳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정성이었다. 딸의 사진 아래에는 말린 꽃다발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딸에게 바쳐진 꽃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가 손수 그 꽃을 하나하나 말렸다. 잘 살펴보면 전시관은 이런 정성으로 가득하다. 그 정성은 ‘딸을 잃은 아버지의 애통함’을 질료로 삼은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딸이 가고 없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구순이 코앞인 아버지는 꽃을 말리고, 부지런히 마당을 쓸고, 전시관을 닦는다.

# 박제된 시간의 추억을 만나는 곳

장진영은 부잣집 딸이었다. 아버지 장 씨는 전주 남문 근처의 대형 문구점 ‘삼화노트’를 운영했다. 전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삼화노트에서 노트나 연필을 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장 씨는 삼화화학 대표다. 그런데 장진영은 배우로 활동하면서 집안의 지원은 전혀 받지 못했다. 생활비조차 벌어서 써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연예 활동에 대한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평생 기업을 운영해 온 아버지 장 씨는 서예가이기도 하다. 규모 있는 전시회에서 특선도 하고, 입선도 했으니 아마추어 수준은 훨씬 뛰어넘는다. 그는 자신을 일러 “‘봉건주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는 노인”이라고 했다. 딸의 연예계 활동을 극구 말렸던 것에 대한 회한이다. 말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미스코리아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격려나 축하는커녕 “너는 아버지 딸이 아니다. 집에 못 들어온다”고 호통을 쳤단다. 딸 영정 앞에서도 “아버지 말 안 들어서 죽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 얘기를 하는 장 씨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딸이 죽고 나서야 장 씨는 비로소 뒷바라지도 해주고 등이라도 두드려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장 씨는 뜻밖에도 딸이 출연한 영화를 지금까지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 뜻을 어겨가며 딸이 한 일’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지만, 영화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딸의 모습을 보면 밀려들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 그러는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기념관 뒤편 높은 언덕 위에는 장진영 묘가 있다. 둥근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은 조형물로 봉분을 만들었는데, 어머니 가슴을 형상화한 것이란다. 그 아래 ‘국민 배우 계암 장진영 묘’란 글씨를 새겼다. ‘계암(啓巖)’은 아버지가 지어준 장진영의 호다. 그 글씨 앞에서 아버지는 또 자책한다. “‘열 계(啓)’에 ‘바위 암(巖)’이란 뜻인데 의미가 너무 강했어. 아무래도 그걸로 탈이 났지 싶어….”

장진영 기념관을 여행지로 추천하는 건, 그곳에서 배우와 영화가 고스란히 박제해 놓은 시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장진영의 팬이 아니라도 좋다. 무릇 대중문화는 그 시대의 모습을 박제한다. 유난히 눈웃음이 고왔던 배우 장진영.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혹은 그가 살았던 시간에서 저마다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위 사진은 옥정호를 내려다보는 근사한 자리에 들어선 카페 애뜨락의 야외 공간. 가운데는 임실읍의 백양국수공장에서 오래된 목조 반죽기로 국수를 만드는 모습. 아래 사진은 임실치즈테마파크.



# 최고의 홍시가 있었던 마을

임실 청웅면 옥전리에는 ‘남양수시(南陽水枾)’가 있다. 남양수시는 남양(南陽) 홍씨가 모여 사는 명동마을에서 나는, 조정에 진상되던 최고 명품 홍시 감(수시·水枾)을 이르는 이름이다. 물이 유난히 많고, 진한 단맛이 난다고 했다. 명동마을이라니 서울 명동을 떠올려 번화한 곳이겠거니 하겠지만 임실 명동마을은 실은, 산과 산 사이에 길게 홈통처럼 생긴 지형에 들어서 있는 마을이다. 밝을 명(明) 자를 써 명동(明洞)이 아니라 ‘홈통 명(椧)’ 자를 써서 명동(椧洞)이다.

명동마을 감의 명성은 1580년대 원주 목사까지 지낸 남양 홍씨 가문의 한 벼슬아치가 서울의 자기 집에서 기르던 감나무를 이곳에다 옮겨 심으면서 시작됐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뒤에 명동마을 감이 맛있다고 소문나자, 마을에서 인조 임금에게 진상했고, 영의정에게도 선물로 줬다. 인조는 이곳의 감 맛을 본 뒤에 극찬했으며, 명동마을 감을 토산품으로 지정해 궁궐에 정기적으로 공급하도록 했다.

남양수시의 명성은 이후에도 이어진다. 1955년에는 전북지사가, 1957년에는 임실군수가 각각 오동나무 상자에 홍시 150개씩을 넣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단다. 남양수시는 시대를 건너서 당대 최고 권력자에게 보내졌을 만큼 맛있고 귀한 감이었다.

명동수시는 본래 명동마을 옛 지명인 가전(柯田)에서 따서 ‘가랏수시’라고 불렀는데, 1962년 김해 과수묘포장과 경남 임업시험장에서 가지를 잘라다가 접붙여 생육에 성공한 뒤, 품종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 집성촌을 이룬 남양 홍씨의 관향을 따 남양수시라고 부르게 됐다.

# 남양수시를 찾아가는 이유

남양수시는 1981년까지만 해도 150여 그루에 달했다. 지금은 남양수시 감나무가 다섯 손가락을 겨우 넘길 정도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피해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베어내기도 했고, 수확이 적고 수분이 많아 유통이나 보관이 어렵다는 이유로 베어진 것들도 있다. 옛 명성을 재현하기 위해 남양수시 나무를 접붙여 길러보려 애쓴 적도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무가 금세 죽기를 거듭해서 지금은 반 포기 상태다.

남양수시 감나무는 마을회관에 한 그루가 있고, 마을 안쪽 홍남표 씨 집 담장 안에 한 그루가 또 있다. 두 그루 다 높이와 수형이 모두 볼품없다. 게다가 영근 감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해에는 그래도 제법 감이 열렸다는데, 올해는 워낙 성글다. 나무 한 그루에 매달린 감이 대여섯 개에 불과하니 감나무 주인도 맛보지 못할 정도다. 마을 주민들은 “섬진강댐이 지어진 뒤부터 감이 영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이제 이렇게 몇 년만 더 지나게 된다면 남양수시는 맛도, 모습도 기억하는 이 없이 그저 전설로만 남을 판이다.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감나무가 다 베어지고, 남은 나무에도 매달린 감이 몇 개 없는데, 왜 그 마을에 가봐야 하나. 다음은 그 대답이다. 남양수시 얘기는 어쩌면 작은 마을을 찾아가도록 하는 구실이기도 하다. 이런 핑계로라도 임실 사람들이 사는 마을 안에 들어가 보자는 것이다. 마을에는 소박한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이 있다. 언제 이런 마을의 한복판에 들어가 보겠는가.

명동마을에 들어서서 뒷짐 지고 돌담길을 걷다가 혹시 주민들을 만나거든 남양수시에 대해 물어보자. 불쑥 찾아간 마을에서 이장이 그랬듯이, 반색하면서 살아남은 감나무를 안내해 주거나, 황홀했던 홍시 맛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자랑하리라. 그저 그 얘기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만으로도, 여행지 주민과 여행자 사이의 선의의 소통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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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젓하고 그윽한 섬진강 강변길

임실에는 섬진강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근사한 강변길이 있다. 그중에서도 첫손으로 꼽을 만한 구간이 진메마을에서 천담교를 지나 천담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비밀처럼 숨어 있는 강변 흙길이었는데, 10년 전쯤 강변 나무를 죄다 베어내고는 흙길을 포장해 자전거 도로를 놓았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나없이 ‘자전거 길 놓기’에 몰두했던 시절 얘기다. 난데없던 자전거 도로도 시간이 묵으니, 예전의 그윽한 정취를 되찾았다. 길은 늘 호젓하고 강은 고요해서, 지나는 마음까지 절로 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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