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 그립습니다 - 박용광 권사(1949~2022)

“당신은 자원봉사를 통해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 앞날을 보는 빛, 서로에 대한 사랑 모두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겨울, 아버지에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친서와 상장이 전달됐다. 40여 년 고된 타향살이를 미국에서 마무리하고 소천하신 뒤 유해를 국내로 모셔온 직후인 터라 고인에게 전달된 친서의 내용이 무척 궁금했다. 알고 보니 생전에 남몰래 불우한 이웃을 위한 봉사를 실천하고 계셨고, 특히 우리의 ‘생명의 전화’ 같은 단체에서 수백 시간 꾸준히 전화 상담으로 봉사해온 공으로 대통령상이 수여된 것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돈키호테 같은 분이셨다. 필자가 기저귀도 못 뗀 어린 시절부터 줄곧 혼자 외국으로 다니셨다. 1970년대 후반에는 프랑스에서 당시 자동차 신기술을 벤치마킹해오셨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건설기술자로 오일머니를 벌어오셨다. 중견기업을 떠나 사업을 벌이신 후로는 일본, 괌, 그리고 마지막 뉴욕까지 홀로 섭렵하셨지만, 어머니는 홀로 한국에서 두 아들을 키우셨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부재를 원망하며 성장했다. 워낙 추진력 있고 사람 좋아하는 유쾌한 성품이셨기에, 역으로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여름 뉴욕에서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병원을 오가는 와중에도 필자에게 전화해 ‘세상과 더 세게 붙어보라’고 충고하셨고, 당신도 병마를 이겨내고 나면 또 다른 일을 계획해 놓고 있다고 호언장담하셨다. 가장의 오랜 객지 생활과 지나친 의욕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때론 식솔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우리네 흔한 아버지들처럼 식구들과 부대껴 살며, 성실히 직장 생활하다 퇴직해 노년을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고인이 된 후에 전달받은 미국 대통령의 친서는 무척이나 의아했고, 그 내용은 아버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 가난이나 질병 등으로 우울감을 호소하는 교민들과 전화 상담을 해주셨다니.

추억해보면, 아버지는 이웃과 공익에 대한 신념, 공공재에 대한 인식이 철저한 분이셨다. ‘회사에서 주는 것이 월급만이 아니다’라고 강론하시면서 사무실의 책상, 의자, 전화, 컴퓨터, 심지어 복사 용지 하나하나까지 회사가 주는 보상이라고 하셨고, 거기에 직책과 직함도 회사가 줄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여기셨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해하기 힘든 직업관일지 몰라도 그 시대의 산업 역군들은 그런 공동체 의식과 애국심으로 산업화를 이끌었다. 필자가 대학생 시절 교회 아르바이트로 번 수십만 원의 급여를 ‘형편 어려운 성도들이 모은 헌금’이라면서 사회에 환원하길 권유하셨던 기억도 있다.

아들이 공직에 입문했을 때는 특별히 더 자랑스러워하시며, ‘돈은 내가 죽을 때까지 벌겠다’고 농을 치셨다.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 당시에는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 활동에 힘을 보태셨고, 뉴욕에 정착하신 후에는 한인교회에서 진행하는 제3세계 해외 선교나 교회 봉사 등에 빠지지 않고 힘을 보태셨단다. 종심(從心)이 가까운 고령에도 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 유럽 최빈국인 우크라이나, 도미니카연방, 케냐, 탄자니아 등을 그야말로 마음 내키는 대로 다니며, 가진 경험과 재능을 총동원해 집을 고치고, 우물을 만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는 데서 삶의 활력과 보람을 찾으셨다고 한다. 그런 분이시라면, 비록 가족들은 몰랐으나, 조국 산업화와 외화 확보에 젊음을 쏟고 노후에 교민 사회와 이웃을 위해 남몰래 오랜 시간 무언가를 하셨다는 사실이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앞서 소개한 미국 대통령의 친서는 이렇게 끝이 난다.

“봉사하라는 부름에 계속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국가는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갑자기 떠나셨지만, 아버지의 유지(遺志) 같은 이 문장을 이제는 남겨진 우리가 각자의 방법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박장원 동명대 객원교수, 전 국가균형발전위 홍보담당관

‘그립습니다·자랑합니다·미안합니다’ 사연 이렇게 보내주세요

이미지 크게보기

△ 이메일 : phs2000@munhwa.com　
△ 카카오톡 : 채팅창에서 ‘돋보기’ 클릭 후 ‘문화일보’를 검색. 이후 ‘채팅하기’를 눌러 사연 전송　
△ QR코드 : 독자면 QR코드를 찍으면 문화일보 카카오톡 창으로 자동 연결　
△ 전화 : 02-3701-5261

▨ 사연 채택 시 사은품 드립니다.
채택된 사연에 대해서는 소정(원고지 1장당 5000원 상당)의 사은품(스타벅스 기프티콘)을 휴대전화로 전송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