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은 영국의 한 치매 환자가 하나둘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려는 의지를 담은 책이다. 게티이미지뱅크

■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 웬디 미첼·아나 와튼 지음 | 조진경 옮김 | 문예춘추사

“뜨거운 감자 먹다 화상 입고
패턴 있는 카펫에 서면 아찔”
신체·감정 변화 세세히 기록

죽은 아버지 환상 볼 때마다
축복의 순간 여기며 즐기고
스카이다이빙도 도전해 성공

치매 이후‘망가지지 않는 삶’
환자·가족에 희망과 위로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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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국민의료보험(NHS)에서 팀장으로 일하던 저자는 58세에 조기 치매 진단을 받았다. 의료기관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치매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미디어에서 접한 단편적 지식이 전부였다. 하나둘 기억이 사라지면 삶에 대한 통제력도 완전히 상실하겠지. 수십 년 전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키운 두 딸에게 짐이 되면 어쩌나.

인생의 ‘끝’이 다가왔다고 느낀 시점에 저자는 새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 블로그를 열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몸과 감정의 변화를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자신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한국·호주·러시아·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 사는 4000명 이상의 환자가 드나들면서 블로그는 정보를 공유하는 장이 됐다. 웬디 미첼의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은 그 기록과 공유의 결실이다. 의료 전문가가 아닌 치매 환자가 쓴 책은 에세이와 연구서의 비율이 7 대 3 정도로 배합돼 있다. 다양한 인터뷰와 최신 연구를 통해 치매 환자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바로잡으면서도 시종일관 따뜻한 에세이의 기운을 잃지 않는다. 공저자인 아나 와튼은 미첼의 초고를 가다듬은 언론인. 첫 진단 후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딸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독립적 주체로 삶을 이어가기 위해 혼자 생활하고 있는 미첼은 말한다. 치매가 있어도 좋은 삶은 가능하다고. 치매는 지금 이 순간에 더욱 집중하게 할 뿐, 치매로 멈춰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책은 치매 발병과 함께 찾아온 감각의 변화로 문을 연다. 치매 환자에게 ‘패턴이 있는 카펫’은 위험하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문양이 시각을 교란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걸어 다니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카펫을 벽과 다른 색깔로 바꿔주는 것도 필수다. 치매는 또 식사의 즐거움을 방해하며 음식과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칼질이 서툴러져 툭하면 음식을 떨어뜨리고, 고기를 얼마나 오래 씹어야 하는지 기억을 잃은 탓에 목에 걸려 캑캑거리는 일도 벌어진다. 뜨거운 감자를 삼킨 뒤에는 감자가 뜨거웠다는 사실을 금세 잊어 다시 먹다 입안에 화상을 입는다. ‘감각 환각’ 역시 자주 발현되는 증상이다. 저자는 어느 날 TV를 보다 화재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불이 난 곳을 찾아 다급하게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화재 흔적을 찾지 못했다. 진짜 냄새가 아니라 환각 증세임을 안 것은 비슷한 일을 몇 번 더 겪고서다. 저자는 이런 ‘뇌의 속임수’를 이해해야 환자와 가족이 치매와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치매는 잔인하지만, 때로 예기치 않은 선물을 안긴다.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을 바라보며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데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 실루엣이 나타났다. 오랜 경험을 통해 환영임을 알았으나 이 순간을 더 즐기기로 했다. 얼마나 오래 마주 서 있었는지는 모른다. 몇 분이었을 수도, 몇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저자가 치매와 ‘추격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그리웠던 아버지의 방문을 축복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육신만 남은 빈 껍데기’ ‘고통받는 사람’ 같은 상투적 표현으로 치매 환자를 규정하는 미디어를 꼬집으며 간병인과 가족을 위한 실질적 조언을 건넨다. 흔히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자녀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촉각을 곤두세운다. 하지만 부모에겐 실수를 해도 내버려둬야 그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온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도 마찬가지다. ‘과민한 부모’처럼 곁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환자 스스로 부딪치고 해결책을 찾도록 돕는 게 주변인의 역할이다. “당신이 모든 일을 대신 해주면 환자 인생에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일은 간섭하지 말고 환자가 자존감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환자의 독립적 삶에 대한 강조는 ‘치매 마을’이 아닌 ‘치매 친화적 도시’를 만드는 데 힘써야 한다는 제언으로 이어진다. 환자 집단을 격리하는 치매 마을은 간병인에 대한 환자 의존도를 높이는 반면, 치매 친화적 도시는 환자와 일반인이 따로 또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운다.

빈 텃밭을 활용해 환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일본 ‘키즈나야’ 프로그램 등이 치매 친화적 도시 조성을 위한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에필로그는 스카이다이빙에 나선 저자를 비춘다. 비행기에서 전문 다이버와 함께 뛰어내리는 이 ‘미친 도전’을 걱정하는 의사와 딸에게 저자는 말한다. 내 삶의 질은 다른 이들 삶의 질만큼 소중하며, 내 삶이 모험으로 가득하길 원한다고. 불운에 맞서는 법을 아는 이 당당한 환자는 하늘에서 낙하산을 펴고 휙휙 지나가는 세상을 보며 기쁨의 비명을 지른다. 치매 환자가 마주한 일상에 관한 세세한 정보와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성찰을 함께 담은 책은 누구의 삶이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교차한다는 것을, 나쁜 일이 닥친다고 해서 삶 자체가 망가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60쪽, 1만6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