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과거사 반성과 사죄에 대해 독일과 일본이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근본적 이유는 ‘천황제’의 존속에 원인이 있다고 역사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천황’이면서 전쟁 책임을 지지 않고 1989년까지 재위했던 히로히토(裕仁). 자료사진

- 일본 ‘레이와 시대’ 개막…다시 짚어보는 ‘천황제’

신권천황 → 상징천황 됐지만
존속 자체가 역사왜곡 뿌리

히로히토 전범 안 되고 면책
‘잘못 없으니 청산할 것 없다’
한·일현안서 日논리 근간 돼

日王양위 3년전 예고됐지만
국내 출판·사학계 저작 미미
“천황제 알아야 과거사 극복”

아베 ‘새로운 시대’ 선전하며
평화헌법 개헌 드라이브 예고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퇴위하고 1일 나루히토(德仁)가 즉위해 이른바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리면서 일본 열도가 들썩이고 있다. 먼 나라들이야 경제대국 일본의 ‘화제성’ 뉴스로 바라볼지 몰라도,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등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를 직접 당한 나라들은 공히 착잡한 감정에 휩싸였을 법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천황 교체’와 ‘연호(年號) 변경’ 등을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연결지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평화헌법 개헌 등에 더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2016년 일찌감치 예고된 일왕 교체 시기에 맞춘 한국의 학계·출판계의 일본 ‘천황제’와 관련된 저작이나 출판물은 예상 밖으로 미미했다. 국민 정서에 천황제에 대한 감정적 배척은 있지만, 그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중요성에 비해 적었던 편이다. 근래에 위안부·강제징용 문제와 독도 등을 둘러싼 한·일 갈등이 더욱 고조되자 독일과 너무 차이 나는 일본의 과거청산 거부와 왜곡된 역사인식, 극우의 극성, 네오내셔널리즘(신국가주의)의 부각 등 역사에 역행하는 행보와 관련지어 그 이데올로기적 뿌리로서 천황제를 다시 바라보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학계에서 근래 발표된 글이나 논문을 보면, 한·일 관계사에 정통한 김창록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한국에서 바라본 천황제’란 글에서 “‘왜 지금 천황제인가?’가 아니라 ‘왜 이제야 천황제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며 “1945년 이후의 일본과 한·일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황제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군국주의 ‘대일본제국헌법’은 천황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존재(1조)이자 ‘신성불가침’의 존재(3조)로 규정했다. 천황제는 국가신앙에 다름 아니었다.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에서 절체절명의 과제는 ‘국체(國體)의 호지(護持)’, 곧 천황제를 지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주권자였던 연합국 미국은 일본 점령을 원활하게 하고, 격화되는 냉전 속에서 일본을 공산권의 방파제로 삼기 위해 헌법에서 ‘신권(神權)천황제’를 없애는 대신 ‘상징(象徵)천황제’로 바꾸도록 타협했다.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지만, ‘절대적 지배자인 현인신(現人神) 천황’으로부터 ‘동경(憧憬)의 중심으로서의 천황’으로 바뀌었을 뿐 ‘국체’는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제도적 차이에 관계없이 천황제는 ‘실질적으로 연속’됐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천황제의 연속은 패전 전후(前後)의 일본의 연속을 의미한다. 김 교수는 “일본 국내적으로 주체적인 과거청산이 전혀 없었고, 그 전형적인 표현이 청산돼야 할 과거의 핵심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면책”이라고 말한다. 전범자에 대한 ‘도쿄재판’이 겨우 7명의 교수형 집행만으로 종결되고 A급 전범 모두가 석방됐다. 패전 후 독일이 ‘스스로’ 9만 명이 넘는 나치 관계자를 재판해 7000건에 가까운 유죄 판결을 내린 것과 대조된다.

천황제의 연속은 ‘잘못이 없으니 청산할 것이 없다’는 논리로 연결돼 대외적인 과거청산의 부재로 이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박진우 숙명여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 내셔널리즘과 천황제’란 글에서 “히로히토가 패전 후 상징적인 존재로 1989년까지 연명하면서 전쟁 책임을 비롯한 천황제가 가지는 문제점을 애매하게 희석시켜 버렸다”며 “결국 일본의 보수우파들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은폐함으로써 자신들과 일본 국민의 전쟁 책임까지도 봉인해 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천황제는 일본 민족의 통합을 강화하는 구심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 일본 민족이 아닌 ‘타자’와 내부의 소수자에 대해선 선별과 배제의 원천으로 기능했다. 박 교수는 “1989년 아키히토 일왕 즉위 이후 줄곧 평화주의를 기원하고 전쟁 희생자에 대해 위령하는 역할을 해왔지만, 전쟁 책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명확히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김용민 건국대 KU중국연구원 연구전임 교수는 ‘일본의 과거사 인식 문제에 있어서의 천황제의 역할과 그 영향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과거청산에서 상반된 나치즘과 일본 제국주의 파시즘의 차이 발생 원인은 ‘천황의 존재’”라고 단언한다. 그는 “나치즘이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 모습을 보인 반면, ‘천황 숭배’·‘신도(神道) 신앙’과 결합된 일본의 파시즘은 미개한 아시아를 계몽한다는 대동아공영론으로 연결돼 ‘독일과 다르므로 아시아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의 근간이 됐다. 김 교수는 “천황제 중심의 이러한 역사인식 재생산 체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동아시아 지역의 과거사 극복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다. 손정권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은 ‘상징천황제의 현재적 의미와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이란 논문에서 “히로히토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후반 일본이 앞세우는 국제사회에 공헌하겠다는 ‘대국주의’의 경향, 이어진 내셔널리즘과 네오내셔널리즘의 등장 등 역사과정은 이데올로기로서 천황제가 여전히 역할하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상징천황제와 네오내셔널리즘의 결합은 단순히 일부 극단적 우익집단의 논리를 넘어 일본 사회의 기억을 왜곡하고 윤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