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줄타기 명인 권원태 씨가 줄 위에서 추석 명절을 보낸 햇수만 무려 40년. 그동안 한가위 인심은 많이 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줄 위에만 오르면 신명이 나며 흥겨운 몸동작과 함께 익살스러운 재담이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 사진은 지난 4일 광화문광장에서의 공연 장면. 곽성호 기자 tray92@

줄타기 명인 권원태 씨…‘줄 위에서 보낸 추석 40년’

“아따∼ 여보게들. 참 먹고 살기 힘드네. 올라왔으나 또 저기까지 건너가기가 지척이고도 천 리 길이네∼. 내 잘 건너가면 재주가 용코, 못 건너가면 재주가 메주가 되는 판이네∼.”

줄 위에서 권원태(50·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씨의 재담이 한마디 터질 때마다 장구, 태평소, 꽹과리, 징, 소고 등으로 구성된 풍물패의 신바람 나는 장단이 흥을 돋운다.

높이 3m, 길이 9m의 줄 위에 부채를 들고 다람쥐처럼 가뿐하게 뛰어오른 권 씨가 우선 덩실덩실 춤추듯 걸어서 한 번 줄 위를 왕복하자 줄 아래 운집한 관객들로부터 박수가 터진다. 그리고 몇 번 펄쩍펄쩍 줄 위에서 뛰더니 앉아서 가랑이로 줄을 타다가 돌연 허공으로 뛰어오른 후 몇 번 빙그르르 돌고 줄 위로 다시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발한다.

매년 추석 명절 때면 더욱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남사당 근거지인 경기 안성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줄타기 명인 권원태 씨다. 추석 명절을 맞아 열리는 전통공연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바로 줄타기이니 당연히 권 씨를 찾는 곳도 많다.

게다가 권 씨는 지난 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에서 장생(감우성)이 줄 위에서 연산군의 화살을 피하는 장면을 대역해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권 씨는 이번 추석 연휴에도 명절 당일인 15일 수원화성 행궁에서 낮 공연을 한 뒤,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립국악원으로 이동해 밤 공연을 하고, 다시 부리나케 짐을 챙겨 경남 창원의 마산 만날제 축제(16∼18일) 현장을 찾아 줄 위에 선다.

‘권원태 줄타기 연희단’이란 이름으로 ‘어름산이’인 권 씨 그리고 악사 5명 여기에 재담을 주고받는 메호씨들까지 함께 움직이는데 이동 수단은 스타렉스 봉고차 2대다. 남사당패에서 줄타기 명인은 ‘얼음을 타듯 줄 위에서 불안한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해 어름산이로도 부른다.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아요. 명절 때 시골 장터 같은 곳을 찾으면 여기저기 떡도 챙겨주시고, 집에 불러다 푸짐하게 상을 차려주는 집도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여인숙에서 아침에 일어나 앉으면 아무도 불러주는 이 없고, 밥 굶기가 예사예요. 식당도 모두 문을 닫잖아요. 수소문해 짜장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흔하죠. 그러니 서울인심이야 말해 뭣하겠어요.”

권 씨는 10세 때 처음 줄을 탔다. 유랑극단에서 활동하던 아버지 손을 잡고 가 처음 줄에 올랐다. 그리고 10대 후반에 집에서 독립해 줄타기 공연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 헤아려보면 추석 명절을 줄 위에서 보낸 시간이 햇수로만 무려 40년이다. 그동안 인심뿐만 아니라 많은 것이 변했다.

우선 요즘은 도심지의 경우 줄을 고정하는 말뚝을 박을 ‘맨땅’이 없어졌다. 그래서 말뚝 대신 중장비 등을 동원해 줄을 잡아줘야 한다. 또 흥겨운 재담도 예전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화개장터 공연이었던 것 같아요. 다리 사이에 줄을 끼고 걸터앉으니 얼큰한 표정의 어르신네들이 “×× 안 깨졌어”라고 해요, 그래서 “내 ××는 집에 떼어놓고 왔으니 써먹지도 못하는 어르신 거나 걱정하셔요”라고 받아쳤죠. 그랬더니 폭소가 터져요. 그러나 요즘은 공연 중에 음담패설을 했다고 지적받을 수 있어 삼갑니다. 또 ‘마음씨 못된 남자’ 표현하며 ‘입은 삐죽 돌아가고, 한쪽 팔은 곰배팔이에…’ 운운하는 묘사도 심심찮게 했는데 지금 그랬다간 장애인 비하 발언했다고 혼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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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에 오르는 40년 동안 비록 인간문화재 칭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권 씨는 명예로운 호칭을 많이 얻었다. 미국 플로리다 탬파베이에서 지난 2004년 4월에 열린 ‘세계의 최고기록-줄타기’ 부문에서 길이 50m 높이 8m의 줄 위를 19초33의 기록으로 가장 빨리 달려 10여 명의 세계줄타기 고수들을 물리치고 챔피언이 됐다. 그리고 2007년 5월 ‘한강 횡단 세계 줄타기대회’에서는 한강 위를 가로지르는 1㎞ 구간(양화지구 선착장∼망원지구)의 쇠줄을 가장 빠른 시간인 17분2초 만에 주파해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또 2014년에는 30초 동안 거중돌기(공중으로 뛰어올라 180도 돈 후 줄 위에 앉기) 12번 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안 좋은 일도 많았어요. 2004년 가을 추석 즈음해 국립국악원에서 줄을 탈 때는 동생의 죽음을 알고서도, 울음을 삼킨 채 줄에 올라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차라리 이 돈으로 장례비라도 하자 싶어 줄을 탔어요.”

2009년 4월에는 영월의 단종문화제 행사에 갔다가 줄을 고정한 말뚝이 빠지는 바람에 줄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줄 위에서 보낸 40년에 이르는 영욕의 세월 동안 그래도 가슴 아픈 기억은 딸의 한마디였다.

“왕의 남자 출연 후 공연 요청이 쇄도했어요. 연간 무려 100회 이상 공연이 몰려 전국을 누비고 다녔죠. 그러니 집보다 밖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어린 딸 아이가 ‘아빠 오늘은 자고 가?’ 그러는 거예요. 참 속상했어요.”

그 같은 미안함 때문인지 이번 추석 연휴에 그는 빼곡한 스케줄 틈새로 경남 창원 공연을 집어넣었다. 처가가 창원에 있기 때문이다. “처가댁에 명절날 찾아뵌 지 벌써 20년도 더 된 것 같아요. 마누라에게도 그렇고 장인, 장모님에게도 항상 죄송스러웠는데 올해는 사람 구실 한번 하게 생겼네요. 가서 어르신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명절 보낸 뒤 마누라와 아이들 손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와야죠.”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