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한무대서 하루씩 교차 공연

아버지와 어머니.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을 제목으로 가져왔지만, 연극엔 기대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없다. 즉, 평생 일만 한 남자의 뒤안길을 조명하거나, 가족 뒤치다꺼리에 지친 여자의 삶을 위로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는 순간부터 소멸의 과정을 겪는 개인이 있을 뿐. 국립극단은 최근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희곡 두 편을 무대에 올렸다. 치매에 걸린 노년의 남성과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중년 여성의 붕괴된 정신세계를 그린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무대에서 하루씩 번갈아 공연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는데, 4년 만의 연극이자 40년 만에 명동예술극장에 다시 오른 박근형과 ‘에이미’ 이후 3년 만에 복귀한 윤소정이 각각 극을 이끈다. 두 사람이 직면한 건 존재의 위기. 연극은 아랑곳없이 담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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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정의 ‘어머니’

빈둥지 증후군 앓는 중년 여성
수면제 과다복용에 심신불안
농축된 감정 완급 조절 탁월

손님을 파자마 바람으로 맞이하는 아버지만큼 당혹스럽다. 어깨를 드러낸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엄마다. 연극 ‘어머니’(연출 이병훈)는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중년 여성 안느의 시선이다.

오랜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심신이 불안정하다. 출장을 간다는 남편은 아무래도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난 것 같다. 여자친구와 동거 중인 아들은 영 소식이 없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과 외출을 하려고 새로 산 원피스를 입었지만, 아들은 싫다고 한다. 한때는 한 식탁에 둘러앉아 다 같이 식사를 했다. 웃고, 떠들었다. 그래서 안느는 행복했고, 그래서 안느는 지금 불행하다.

과거의 기억에만 집착하는 안느는 자기 존재를 잃어가고 있다. 의타적인 삶을 살다 주체성을 인식하며 자의식의 붕괴를 느끼는 거다. 남편을 의심하고, 아들에게 집착한다. 여자친구와 떼어놓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남편은 주도면밀하다. 꼬리를 잡히지 않으니,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무대는 강박증적인 안느의 머릿속처럼 집요하게 같은 장면을 반복한다. 관객들은 나름대로 퍼즐을 맞춰가며, 안느의 심리를 탐색하고 실재를 추리해 보지만 쉽지 않다. 어디부터 환상이고, 어디부터 현실일까. 노력은 매번 허사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 퍼즐은 처음부터 맞출 수 없게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멸, 존엄성의 붕괴. 즉, 노년이라는 두려운 신세계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인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기에. 침대에 누워 아들에게 목을 졸리는 환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에 이르면, 극이 잔인한 결말에 다다랐음을 눈치챌 수 있다. “당신은 혼자 늙어갈 거예요. 그렇게 살아갈 거예요. 아주 고통스러울 거예요.” ‘툭’. 냉정한 대사가 무심하게 떨어진다.

연극은 의도된 분절로 가득하다. 배우로서는 슬픔이나 고통을 차곡차곡 쌓을 시간이 충분치 않아 더욱 힘든 무대. 감정이 농축된 채로 무대에 올라선 윤소정의 완급 조절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교훈도 위로도 없는 극을 맛깔스럽게 버무리는 힘이 놀랍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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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의 ‘아버지’

치매노인 시선으로 본 일상
자식의 아이가 되는 비참함
존엄성에 대한 담담한 질문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앙드레’. ‘아버지’(연출 박정희)는 온전히 앙드레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같은 듯 다른 장면과 대사가 계속 반복되는데 매끄럽지 않고, 파편적이다. 치매 걸린 이가 보고 듣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편집된 기억이기도 하고, 환상이기도 하며, 때론 꿈속이다. 아파트의 가구 배치는 매일 달라지고, 딸의 남자친구가 여러 차례 바뀐다. 상냥했던 간병인이 쌀쌀맞은 간호사로 변신하더니, 심지어 딸의 얼굴이 못 알아볼 정도로 변했다. 시계는 왜 자꾸 손목에서 사라지는 걸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의 연속. 앙드레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인데, 극은 시종일관 침착하다. 무대가 덤덤할수록 잔인한 현실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느낌이다.

앙드레의 기억은 점점 더 불안정해진다. 퇴행이다. 딸에게 의지하다가, 종국엔 자신의 이름마저 모르는 상태가 된다. 낯선 간호사의 품에 안겨 “엄마가 보고 싶어요”라고 속삭이는 모습에서는 연민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이 밀려온다.

나의 부모가 언젠가 자식처럼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될 거라는 것, 그리고 그 전철을 나 역시 밟을 거라는 것. 우린 모두 부모의 존엄성이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보거나, 혹은 점점 소멸되는 나 자신을 자식에게 들켜야 하는 거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 않다.

연극은 감상주의를 경계하며 담담하게 전개된다. 아주 평범하고 당연하고, 사소한 일상처럼 말이다.

별다른 장치 없이 간소한 무대는 앙드레의 기억이 사라져 갈 때마다, 하나씩 가구를 치우는 것으로 시공간의 변화를 알린다. 텅 빈 무대, 조명도 점차 잦아든다. 무대 위엔 아무것도 없다. ‘존재의 위협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만을 남겨두고.

변화무쌍한 앙드레의 무의식은 관록의 배우 박근형을 만나, 관객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저것은 미래의 내 이야기가 아닌가. 90분의 관극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겪게 될 존엄성 상실의 예행연습일지도 모른다. 8월 15일까지. 1644-2003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사진 = 국립극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