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 = 조연수 기자 choys@

DJ·盧정부때 진보 관료 영입
문화계 이념 편향성 논란 확대
정치부패 부각·美 부정적 묘사
천안함 등 현안 왜곡하기도

출판·문학·시민사회 영향 급감
클래식·미술 고급 애호가 중심
인문학도 시장 논리안에 편입
기업·포털, 학자들 강의 열풍

헤게모니 기업쪽으로 넘어가
‘좌파 - 우파 상업주의’ 말까지
공공성 영역 얼마나 확보하느냐
건강한 문화 생태계의 관건

한국의 문화 권력은 누구인가.

문화가 사회 변혁을 이끌던 1970·80년대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평론가 백낙청과 시인 김지하 등 소위 ‘진보적 지식인 그룹’이었고, 드라마 ‘모래시계’(1995), ‘허준’(2000)이 60%가 넘는 시청률을 자랑할 땐 지상파 TV이기도 했다.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으로 카퍼레이드까지 벌인 지휘자 정명훈부터 88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지휘한 평론가 이어령, 할리우드에 도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신지식인 1호(1999)로 뽑힌 심형래,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을 거쳐 ‘강남스타일’로 유튜브를 평정한 싸이까지, 국제 사회의 인정에 대한 허기진 욕구 속에 세계로 진출한 예술가는 언제나 문화 권력이 됐다. 최근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연극배우 김명곤, 이창동 감독 등 진보 인사들이 대거 문화 관료로 영입되면서 좌파 문화권력 논쟁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흐름에 문화도 예외일 수 없는 데다 출판·문학·시민 사회의 영향은 급감하고, 클래식·미술은 고급 애호가 중심으로 영향력 확장이 제한되면서 이제 문화권력이라면 SM, YG 같은 엔터테인먼트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까지 연 지드래곤과 200만 팬클럽을 자랑하는 엑소 같은 ‘산업화된’ 대중 스타들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문화 지형은 빠르게 ‘이념에서 시장과 자본’으로, ‘문화 공동체에서 자본 공동체’로 재편·심화되고 있다. 문화 전 분야에서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느냐가 진보 vs. 보수라는 이념은 물론 사회적 규범과 공공성을 뛰어 넘었다.

◇이념에서 자본으로=지난 6월 신경숙 표절 파문 이후 백낙청 창비 편집인과 창비가 신경숙을 옹호하면서 ‘문학권력’ 논쟁이 벌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문학 상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주례사 비평으로 무장한 창비, 문학동네 등이 문학권력으로 비판받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의 보호도 사태의 여러 단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출판 평론가 장은수 순천향대 초빙교수는 “한때 이념이든, 지향점이든 취향이 다른 문학 공동체를 형성했던 창비, 문학과지성, 문학동네 등은 이제 문화적 차이 없이 거대한 문학 자본을 나눠 쓰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또 다른 평론가는 “작가 역시 책을 잘 팔아주고, 광고 많이 해주고, 선인세 많이 주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려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고 꼬집었다. 시민사회에 복무하는 공공적 역할이라는 문학의 오랜 역할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가장 최근까지 계속된 문화권력 논쟁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진보 인사들이 문화 관료 및 기관장으로 대거 영입된 데 이어 2013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희화화하고 비판하면서 문화계 이념 전쟁을 촉발시켰다. 이와 함께 ‘화려한 휴가’ ‘26년’ ‘변호인’ ‘천안함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영화들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문화계의 이념적 편향성 논란도 확대됐다. 이들 영화에서 한국 정치는 부패했고, 미국은 부정적으로 묘사됐으며, 정치적 현안은 왜곡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 인터넷을 중심으로 보수 매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영화 ‘명량’의 흥행 성공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 지형을 결정하는 최대 변수는 얼마나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느냐로 수렴됐다. 이에 돈이 되면 무엇이든 한다는 의미에서 ‘좌파 상업주의’ 혹은 ‘우파 상업주의’라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영향력 있는 팟캐스트가 딴지일보의 ‘나는 꼼수다’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빨간 책방’으로 바뀐 것은 이 같은 변화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문화 자본화와 자본의 집중은 대중문화 쪽에서 더욱 분명하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대형 문학 출판사 사이에 차이가 없듯이 한국 영화계를 장악하고 있는 CJ, 롯데, 쇼박스, 대중문화를 좌우하는 대형 엔터테인먼트사들은 시장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지닐 뿐 그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 자본에 좌우되는 현 문화지형의 출발점을 1995년 SM의 설립으로 봤다. 이어 1996년 양현석의 ‘YG’(당시 현기획), 1997년 박진영의 ‘JYP’(당시태홍기획)가 등장해 기획사들이 보이콧 하면 방송이 되지 않는 판으로 바뀌었다. 이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사의 등장이 아니라, 문화적 헤게모니가 비교적 공적인 방송에서 기업으로 넘어간 의미라고 그는 풀이했다.

한편 자본·상업성과 거리가 있는 인문학이 자본과 시장 논리 안에 막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최근 몇 년간 사회적으로 인문학 열풍, 강의 열풍은 결국 인문학과 전혀 관계없는 기업, 포털들이 인문학 콘텐츠에 대거 진출하게 했고, 한편에서는 인문학자들의 일종의 전속 움직임이 생기는 구조로 재편돼 가고 있다.

◇공공성의 복원=“대자본들이 움직이는 와중에 독립 자본들이 히트작을 내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한기호 한국 출판마케팅 연구소장의 진단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다양성 영화들이 제작되고, 출판에서는 1인 출판사들이 의미 있는 선전을 벌이고 있지만 전체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엔 역부족이라는 설명이다. 이 같은 자본과 시장 중심의 문화권력이 낳는 가장 큰 문제는 ‘공공 영역의 실종’이다.

한때 인터넷과 SNS가 중심-주변의 이분법적 구도를 깨고, 공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소셜 미디어는 오히려 개인의 개별적 쾌락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이택광 교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문화도 대중적 상업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다양성이 사라진 대중화·상업화·산업화는 창의력에 기반을 둔 새로운 개념의 콘텐츠를 만들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앞으로 가속화할 ‘시장 논리’ 움직임 속에서 ‘공공성’의 영역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우리 문화의 생산력과 문화적 건강함의 관건이 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를 한꺼번에 해결할 묘수는 없다. 문화·예술가들의 인식에 기댈 수밖에 없고, 공공 도서관을 비롯한 공적인 영역 확대, 지방자치단체 역할 확대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넓혀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경희대 교수도 “(문학의 경우) 작가들이 대안적이고 탈근대적인 삶의 양식들을 추구하고, 현실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쟁점들을 발견해, 독자들의 감수성 변화를 견인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