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송재우 기자 jaewoo@munhwa.com

문화계에서 진영 논리에 매몰되고 과도한 정치적 해석이 난무하는 이념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진보성향의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공개하면서 불붙은 역사 논쟁은 교과서 문제를 거치며 사회적 갈등으로 확대됐다. 천안함 침몰 사건에 의혹을 제기한 다큐 ‘천안함 프로젝트’(감독 백승우) 역시 상영가처분신청과 상영중단으로 이어지며 사회 이슈가 됐다. 이와 함께 연극 ‘한강의 기적’(극단 민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로 몰렸고, 국립극단의 ‘개구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미화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여기에 배우 수지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26년’에 대한 소감 한마디로 ‘개념있는 진보’가 되고, 그룹 크레용팝은 하루아침에 ‘일베주의자’로 몰린 사태는 연예인의 ‘가벼운 발언’까지 정치적 틀로 해석하는 우리 사회의 과도한 정치화와 감정싸움 수준으로 떨어진 진영 대립을 보여준다.

문화는 태생적으로 기존 미학과 질서에 대한 전복이며 치열한 논쟁 위에 꽃피는 종다양성 세계라는 점에서 논쟁은 긍정적이지만 현 상황은 생산적 논쟁보다는 편 가르기에 매몰된 혼돈에 가깝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맞짱은 있고 토론은 없다 = “토론 자체가 불가능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백년전쟁’을 둘러싸고 시대정신과 벌인 ‘논쟁’ 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백년전쟁’이 박 전 대통령을 ‘미국 꼭두각시’로,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안 갱스터’로 묘사해 역사논란을 일으킨 뒤 민족문제연구소와 보수성향 시민단체인 시대정신은 공개토론 등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본질을 벗어난 진영 논리와 말꼬리 물기로 일관해 시간만 낭비했다. 유재길 시대정신 사무처장은 “예견된 결과로 진보와 보수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조차 쉽지 않다”며 논쟁수준을 개탄했다. 역사 교과서 문제 역시 ‘역사 전쟁’ 수준이 됐지만 제 목소리를 내는 학자는 많지 않다. 중도성향의 한 젊은 역사학자는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키우는 일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밥그릇 챙기기와 편 가르기만 하다니 한심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천안함 프로젝트’는 법원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에도 불구하고 극장 상영이 중단됐고, 인터넷(IP)TV와 케이블TV에서 퇴출됐다. 반면 ‘한강의 기적’은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용비어천가 연극’으로 비판받으면서 극장 대관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당시 연출가 정진수는 “일부 언론과 연극인들이 공연을 보지도 않고 ‘5·16 쿠데타 미화 연극’으로 시비를 거는 것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환경 속에서 정보가 빠르게 전달·확산되면서 본질에 대한 정확한 판단 없이 마녀사냥식 여론 몰이가 횡행하고 있다.

◆문화권력과 기득권 = 문화계 이념 논쟁은 모든 시대에 있었고 문화는 정치와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실제로 1970·1980년대 마당극, 민중미술, 참여문학은 현실 정치의 결과물인 동시에 현실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현 논쟁은 핵심 논점이 없는 진영 싸움에 가깝다. 예를 들어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문화논쟁의 중심이었던 ‘순수 VS 참여’의 경우 각 진영엔 대표 학자, 대표 지식인이 포진해 있었고 존경까지는 아니어도 서로 인정하는 체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양 진영의 대표 지성인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 그 자리엔 SNS 스타가 대중을 쥐고 흔드는 혼미한 상황이다. 이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간 문화계가 정치계 못지않은 이념 대립의 진원지가 돼 순수파 예술인들이 한꺼번에 밀려나면서 대립항으로서의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명박 정권까지 정권에 따라 단체장들이 바뀌면서 문화가 정치에 좌우되는 구조가 형성됐다. 진영 간 판세만 놓고 보면 문화가 근본적으로 기존질서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진보적인 데다 지난 수십 년간 진보적 문화인들이 각 분야에서 탄탄하게 입지를 다진 데 비해 보수 쪽은 뿌리로나 현실적 힘으로나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다. 몇 안 되는 문화계 보수파인 소설가 이문열 씨가 “문화계에서 진보 대 보수는 9 대 1”이라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각 문화장르의 강한 정치성을 진영 논리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 씨는 “‘화려한 휴가’ ‘26년’ ‘부러진 화살’ 등의 경우 이미 우리 영화가 다루고 넘어갔어야 할 문제들로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생산적 논쟁 =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정치는 한쪽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인 데 비해, 문화는 어느 쪽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 차이다. 문화는 원래 가치가 뒤섞이는 지점이다”며 “논쟁이 억견으로 끝나지 않고 각 진영이 주장을 증명해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오히려 매우 발전적인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다만 “양 진영의 기득권과 정치권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그는 “생산적 논쟁 여부는 결국 문화와 우리 사회 내부 역량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최현미·박동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