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순진한 노총각 미치(윤정섭 분·왼쪽)를 유혹하다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자 절망에 빠진 블랑쉬(김소희 분·오른쪽)가 절규하고 있다. 명동예술극장 제공

숨을 멎게 한다. 블랑쉬 역의 김소희와 스탠리 역의 이승헌이 뿜어내는 열연의 불꽃은 관객들의 눈과 귀,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만든다. 오는 9월 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이미 지난해 가을 대학로 소극장 공연에서 화제가 됐던 작품. 이번에 중극장 규모의 명동예술극장으로 무대를 옮겨 다시 한번 감동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단언컨대, 이번 공연까지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영화로 유명하다. 블랑쉬 역의 비비안 리와 스탠리 역의 말런 브랜도를 일약 대스타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도도한 척하면서도 유혹적인 캐릭터의 비비안 리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등 4개 상을 휩쓸었다. ‘짐승남’ 말런 브랜도의 저열하면서도 원초적인 생명력의 분출 또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젊음도 부도 명예도 모두 잃었지만, 도도함만은 여전한 블랑쉬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가진 허영과 세속성을 대표한다. 비비안 리를 비롯해 제시카 랭, 케이트 블란쳇, 레이철 와이즈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도전했던 블랑쉬는 아름다운 겉모습 뒤에 숨겨놓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하나씩 드러내며 파국을 맞이하는 비극적 여주인공이다.

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몰락한 지주의 딸 블랑쉬는 몸을 의탁하기 위해 뉴올리언스 빈민가의 여동생에게 간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허영심뿐. 여동생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는 동물적 야성미를 발산하는 가난한 도시 노동자로, 늘 교양과 예의를 들먹이는 블랑쉬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과거의 환상만을 좇는 블랑쉬는 열악하지만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스텔라 부부와 끊임없이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 와중에 블랑쉬는 이웃에 사는 순진한 노총각 미치를 유혹한다. 그러나 블랑쉬가 숨기려 애썼던 과거가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다.

김소희가 연기하는 블랑쉬는 원작의 캐릭터를 적절히 살리면서도 또 다른 맛을 더하고 있다. 연희단거리패 특유의 스타일을 가미, 보다 유희적인 색깔의 연기를 보여준다. 일종의 낭만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같은 연기는 블랑쉬 역이 갖고 있는 사실적인 비극성과 대비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관객의 신경줄을 풀었다 죄었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블랑쉬가 쏟아내는 대사들은 더욱더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

예컨대 블랑쉬가 “똑바른 게 뭐가 있는데? 선이나 길은 똑바를 수 있지만 사람 마음은 안 그래, 산길처럼 꼬불꼬불하다고”라고 항변하거나 “난 현실은 싫어요. 난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마법! 난 사람들에게 마법을 쓰려고 애써요. 난 일부러 거짓말을 말해요. 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이야기해요. 그리고 그게 죄라면, 지옥에라도 가겠어요!”라고 외칠 때 관객들은 어느새 그녀의 말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연출을 맡은 채윤일 씨는 “희곡의 일상적인 부분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여주인공 블랑쉬의 심리를 따라가는 심리적 공간을 무대화하는 방향으로 압축해 보았다”며 “이 때문에 테네시 윌리엄스의 언어와 당시 미국의 메소드파 연기를 선호하는 관객들에게는 부정적인 무대가 될 수밖에 없지만 이 공연 나름대로 장점이 많은 무대가 되리라는 믿음이 있다”고 밝혔다. 1644-2003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