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경기부진과 가계저축률 하락에 따른 소비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의 유통업체들이 고객들의 발길을 붙잡기 위해 과감한 할인품목을 소개하는 전단지 광고물로 적극적 판촉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에 좀비 기업들이 있다면, 미국에는 좀비 소비자들이 있다.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다.” 미국의 3월 소비지표가 발표된 지난 15일 스티븐 로치(경제학) 예일대 교수는 CNBC에 출연해 미국 소비자들을 ‘좀비’라고 불렀다.

비관적 경제학자 그룹인 ‘닥터 둠’ 중 한 명인 로치 교수는 이날에도 역시 거침없이 쓴소리를 쏟아냈다. 그가 미국 소비자들을 좀비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저곳 쇼핑몰과 마트를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정작 지갑을 열고 구매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걸어다니는 시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17일 워싱턴 DC 인근의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리하이웨이 블리바드의 월마트. 캠핑 시즌을 맞아 콜맨 8인용 텐트를 194달러, 2구 스토브는 49달러에 판매하는 등산·캠핑장비 특별세일을 진행중이지만 고객들의 발길은 뜸한 편이다. 주로 야채와 과일, 육류가 있는 식료품 코너를 찾을 뿐 소비자들은 공산품 구입은 꺼리고 있다.

경기침체로 인한 매출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월마트의 제리 무레이 부사장은 최근 경영진에게 보내는 이메일에서 “지난 2월 매출은 재앙에 가깝다”면서 “내가 월마트에서 재직한 지난 7년 중 가장 저조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월마트의 지난해 4분기 매출은 1279억 달러로 전년동기의 1231억 달러보다 늘었지만 시장예상치인 1287억 달러에는 미치지 못했다.

미국 소비자들이 ‘좀비’로 전락한 이유에 대해 로치 교수는 “소비자들이 저축할 돈이 없고, 소득 대비 빚이 너무 많아 빚 청산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소비자들은 빵과 우유, 계란 등 기초 생필품만 구입할 뿐 돈을 쓰지 않고 있다.

로치 교수는 실제로 미국의 지난 5년간 소비 증가율이 매년 1%에 못미친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유럽발 재정위기 불안감도 있지만 실제로 미국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갑을 열고 싶어도 남아 있는 돈이 없는 상태다.

그렇다고 저축이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주택구입자금(모기지) 상환에 의료보험, 기름값, 생활비, 연금보험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렌트비를 내고 나면 한 달 생활하기도 빠듯하다. 16조7000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한 연방정부의 시퀘스터(연방정부 예산자동삭감) 발동은 미국민들의 소비여력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가계는 물론이고 정부에서도 부채가 수입을 잠식하면서 미국이 성장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가계의 저축률이 낮아 건전한 소비를 뒷받침하지 못하면서 경기침체의 악순환 고리로 빠져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경제데이터(FRED)에 따르면 미국의 가계저축률은 1992년 7.3%에서 줄곧 떨어져 2012년에는 3.9%를 기록했다. 금융위기가 찾아온 2008년과 2009년에만 각각 5.4%와 4.7%로 상승세를 보였을 뿐 전반적으로 저공행진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저축률은 한국 가계저축률 2.7%(2011년 기준)에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높다. 한국의 저축률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말해주는 지표다. 미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던 지난 1969년에는 가계저축률이 7.8%를 기록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인위적 경기부양으로 미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벤 버냉키 의장은 매달 850억 달러 채권을 사들이는 양적완화를 진행중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샌드 오일 채굴과 유전 개발 확대 등 에너지 산업 육성과 교육 투자, 과학기술산업 육성을 통해 막힌 경제의 탈출구를 만들 계획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미국처럼 부존자원도 없고, 기초과학 기술수준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기축통화인 달러화와 다르게 원화를 마구 찍어낼 발권력도 충분치 않다. 저축률이 계속 하락세를 보일 경우 성장 잠재력이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국민들에게 저축여력을 안겨줄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면 경기침체의 악순환은 물론 구조적인 빈부격차의 늪으로 빠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워싱턴 = 글·사진 이제교 특파원 jk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