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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인문학 / 서동욱 기획, 강양구 외 지음 / 반비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난리가 날 것처럼 떠들썩하던 ‘인문학의 위기’가 어느덧 ‘인문학 열풍’으로 뒤바뀌었다. 온·오프를 넘나들며 각종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고,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 ‘CEO를 위한 인문학’ ‘어린이 인문학’ 심지어 ‘엄마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이제 인문학은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고, 습득해야만 하는 ‘교양’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유행어가 돼 버린 인문학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이 새삼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런 현상은 바람직한 것인가, 이 같은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책은 크게 4부로 나뉘어 있다. 각부의 제목은 ‘팔리는 인문학’ ‘잃어버린 인문학’ ‘싸우는 인문학’ ‘가능성의 인문학’ 등. 우선, 1부 ‘팔리는 인문학’에선 인문학이 장사나 화제가 되는 작금의 사례를 다루고 있다. 예컨대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애플이 있다”고 장담했다.

지난 대선에서 유력 후보로 떠올랐던 안철수 역시 “제가 인문학은 좀 아는데 정치는 잘 모른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동양고전이 직장인의 처세술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인문학이 ‘인기 상품’으로 팔리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 같은 현상이 내포한 의미는 무엇인지를 6편의 글들이 소상히 밝히고 있다.

2부 ‘잃어버린 인문학’에선 한때 성황을 누렸지만 이제는 제자리를 잃어버린 인문학에 대한 진단이다. 1980년대 최고의 성가(聲價)를 누렸던 사회과학은 어느덧 사회공학으로 전락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학문어’로 굳건히 자리 잡았던 독일어 역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전통적인 심리학은 떠오르는 뇌과학에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대하역사소설은 이제 더 이상 생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인문학 대신 과학주의가 들어서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7편의 글이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3부 ‘싸우는 인문학’에선 인문학이 갖고 있는 가장 씩씩한 얼굴을 드러낸다. ‘저항의 철학’과 여성학의 성폭력 담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시와 영화(속 인문학)가 갖고 있는 힘 등 기존 질서와 가치를 전복하는 무기로서 인문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6편의 글을 통해 기존 체제의 허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싸우는 인문학의 현장을 추적하고 있다.

마지막 4부에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문학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한다. 가령 민족주의적 역사기술과 포스트모던, 트랜스내셔널 역사관을 모두 뛰어넘는 새로운 한국사는 가능한지, 고전 주석을 넘어 살아 있는 현대철학으로 동양철학이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인지 등을 점검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에서 영화나 문학 작품을 비평하는 데 활용돼 온 정신분석학이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로 기능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따져 본다.

한마디로 인문학을 둘러싼 뜨거운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모두 25개의 주제를 통해 ‘지금, 여기의 인문학’을 총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덤으로, 오늘을 사는 인문학자들의 치열한 고민 또한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기획한 서동욱 서강대 교수의 서문에서 한 구절. “눈은 내리고, 저녁은 매일매일 오늘이 너의 마지막이어도 좋은가 물으며 할 일을 재촉하지만, 눈은 쌓이고 세상은 속절없이 계속 치워야 하는 백색의 장애로 가득하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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