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추석(30일)을 앞두고 선물용 택배물량이 급증하는 가운데 26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한 택배터미널에서 직원들이 전국 각지로 배송할 물품을 분류하고 있다.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

“단골 고객에게 ‘왜 썩은 배를 보냈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알고 보니 ‘배송 시 주의’ 표시를 했음에도 택배기사들이 배송물을 함부로 다뤄 배가 물러 터졌더라고요.”

경기 양평군 지평면 옥현리에서 배농사를 짓는 장모(여·55) 씨는 추석(30일) 연휴를 앞두고 고객이 주문한 배를 택배로 발송했다가 아찔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품질만큼은 자신 있었던 유기농 명품 배가 썩은 채 고객에게 도착했던 것. 하마터면 단골 고객을 잃을 뻔했던 장 씨는 “상품(上品) 배를 다시 발송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성난 고객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금전적 손해와 함께 농부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장 씨는 “배는 살짝 멍만 들어도 물기가 흘러나와 옆의 온전한 배까지도 덩달아 썩게 만드는데 택배기사들의 부주의로 벌써 여러 차례 손해를 봤다”며 “항의를 했지만 택배기사들이 도리어 온전히 배달했다고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손해배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사는 직장인 김모(31) 씨의 경우 지인이 보냈다는 추석선물 택배를 아예 받아 보지도 못했다. 택배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직장에 있던 김 씨는 택배기사의 전화를 받고 경비실에 맡겨 놓으라고 했으나 정작 퇴근 후 경비실을 찾았을 땐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경비원도 택배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해 결국 김 씨는 씁쓸한 기분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추석선물 등 택배 배송이 급증하는 가운데 택배기사들의 ‘마구잡이식 배송’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가 올해도 어김없이 속출하고 있다. 명절 때면 택배기사 한 명이 하루에 배달하는 물건 수가 무려 240개까지 폭증하는 데다, 택배 이용요금 자체가 건당 평균 2000원대로 덤핑성에 가까워 이 같은 악순환이 매년 반복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7일 공정거래위원회 및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명절 기간 택배물량이 급증하면서 배송 지연 및 이에 따른 물품의 변질이나 부패, 택배기사의 부주의로 인한 배송물의 훼손·도난·분실 등의 소비자 피해가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추석 연휴가 다가오면서 택배물량이 최고조에 이르고, 오는 30일 추석 당일 이후에도 택배가 도착하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피해사례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소비자 피해 구제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택배업체와 기사들이 서로 책임을 미루며 변상을 거부하거나 과실을 범한 택배기사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대다수 소비자들이 배송 의뢰 시 ‘발송된 물품의 훼손·분실 등에 대해 업체 측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소위 ‘면책특권’에 동의하는 점도 피해 보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 추석 연휴를 포함한 3주 동안(2012년은 연휴 전 3주) 소비자원에 접수된 택배운송서비스와 관련한 피해상담 건수는 2008년 224건, 2010년 650건, 2011년 693건, 2012년 558건으로 꾸준히 증가했으나 같은 기간 구제 건수는 각각 10건, 12건, 16건, 15건에 불과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택배업계도 나름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명절 기간엔 보통 30∼50%가량 물량이 급증해 인력을 증원하고 주말까지 반납하고 일해도 배송 처리에 애를 먹는다는 것이다. 택배기사 곽모(26) 씨는 “기사 1명당 하루에 240개 이상의 배송이 몰려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1시간에 20개 정도를 배송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물품 1개를 3분 안에 배송하는 꼴이라 점심까지 거르며 일하는 택배기사들이 수두룩하다”고 하소연했다. 곽 씨는 “낮 시간대엔 수령자들이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 내에 배송을 완료하기 위해선 경비실이나 이웃집에 물건을 맡기거나 단독주택의 경우 베란다에 두고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택배업계 관계자는 “택배 건당 평균 2000원대의 비용을 받는데 그중 기사에게 떨어지는 돈이 600원에 불과하다”며 “물론 택배기사 개인의 잘못도 크지만 택배비용을 현실화하고 그만큼 양질의 서비스가 가능한 여건을 만드는 구조적인 개선 노력이 선행돼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토로했다.

현재로선 결국 소비자들이 조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윤영빈 한국소비자원 팀장은 “운송장을 주의 깊게 작성하고, 물품의 배송 상황을 수시로 확인하며, 배송받은 박스가 찌그러져 있을 경우 기사 앞에서 개봉해 파손이 있으면 손해배상 확인서를 미리 받아둬야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택배회사가 면책특권 동의를 얻었다고 주장해도 배송과정에서 생긴 피해는 원칙적으로 택배회사에 책임이 있으니 이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준영 기자 cjy324@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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