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7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한국개발연구원(KDI) 집무실에서 현오석 원장이 한국을 넘어 글로벌 싱크탱크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현오석(62)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KDI 개원 41년 역사에서 최초의 연임 원장이다. 그의 연임을 놓고 일각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도 터져나왔지만 ‘한국의 대표 국책연구기관’을 넘어 ‘글로벌 공공 싱크탱크’를 지향하는 현 원장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다. ‘사상 최초’란 수식어 뒤엔 무슨 배경이 있을까, 물음표를 간직한 채 지난 7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KDI 원장실을 찾았다.

― 지난 4월9일 원장으로 연임 취임식을 하셨지요? 12명의 전임 원장과 차별되는 기록을 세운 셈인데 스스로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만제 초대 원장께서 10년 넘게 재임하셨고, 제5대 구본호 원장이 잔여 임기에 이어 새 임기를 채운 선례는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2번의 임기를 ‘계주’한 것은 현 원장이 처음이다.) 비결, 뭐 이런 것보단 세종시 이전도 마무리해야 하구요, 책임감이 큽니다.”

KDI는 지난해 10월24, 2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민주화와 세계화 시대 한국경제의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40주년 기념 국제회의를 열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단기간 내 선진국 대열로 뛰어오른 원인과 배경을 분석한 회의였다.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 중인 ‘정책한류’의 현주소를 확인한 자리이기도 했다. 지난 1971년 3월 국책연구기관으로 설립된 KDI는 한국경제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독보적인 연구기관에서 이제 민간연구소와 상호보완적 공생관계로 들어선 공공 싱크탱크로 변모 중이다. 2013년 말에는 세종시 이전도 예정돼 있다.

― 어떤 목표를 갖고 KDI를 3년간 더 이끌 생각이신가요?

“3가지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KDI 위상의 국제적 제고입니다. 한국의 국격 제고에 걸맞게 우리도… KDI가 대한민국의 대표 경제연구기관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둘째는 국책연구기관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 겁니다. 즉, 정부보다 선제적으로 정책대안을 마련해 제시하는 거지요. 가이드 역할을 하는 거랄까요? 사후 수습도 필요하겠지만, 정책 당국보다 선행해서 예방적 차원의 경제정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셋째, 이제 경제현상은 경제학적 방법만으로는 접근이 어렵다, 그래서 사회·정치적 시각을 합친 통합적·학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달리 표현하면 정책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활한 집행도 필요하다는 얘기죠. KDI가 과거에는 단순히 정책을 수집하는 단계였다면, 지금은 정책을 어떻게 집행하느냐 하는 전략까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사회갈등 등 제약사항을 풀어가는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들과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KDI 국민경제정보센터가 정부정책에 대해 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하거나, 청소년층에게 올바른 경제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앞으로 3년간 KDI의 역할 중 더 강조돼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현 원장은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에 ‘첫째, 둘째, 셋째…’하는 논리적 화법으로 대화를 차분하게 이끌었다. 인터뷰 초반 분위기가 너무 늘어질까봐 부러 ‘까칠한’ 질문을 툭 던져보았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한 2009~2012년의 첫 3년 재임 동안 정부의 전망치를 앞지르는 낙관적 수치를 잇달아 발표, 반MB 진영으로부터 ‘경제 경호실장’ ‘경제 찬양 전도사’란 비아냥을 들었다. 한 진보매체가 최근 ‘가카의 KDI 길들이기’란 제목의 비판 기사를 게재하자 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해명자료를 내기도 했다.

― KDI가 너무 긍정적인 전망을 줄줄이 내놓아 구설수에 오른 건 아시죠? 때론 정부의 선전기구로 전락했다는 일부 언론의 비판까지 들었는데요.

“저희가 안 그래도 지난해 4월에 ‘연구기관의 역할’이란 주제로 국제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국책기관도 똑같은 어려움과 비판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한편에서 정부예산에 의존하면서, 독립성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는 큰 숙제입니다. 호주의 연구기관인 생산성센터 관계자가 재미난 표현을 하더군요. 정부가 ‘무엇을 하라고(What to do)’는 할 수 있지만, ‘무엇을 말하라고(What to say)’는 할 수 없다고요. 예산을 정부출연에 의존하는 국책연구기관은 필요한 연구과제를 정부와 논의는 해야 합니다. 정책연구를 해야 하니까 정부와의 다이얼로그(대화)는 끊임없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부가 정보도 가장 많이 갖고 있고, 프라이오리티(우선순위)도 갖고 있습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원하는 보이스(목소리)가 아니라, 객관적 정보를 내놓아야 합니다. KDI가 한국경제에 대해서는 가장 예측력이 높다고 자부합니다. 2009, 2010년 경제성장률 예측이 그 예지요. 정부 뜻대로만 한다는 건 기우입니다. 다만 KDI 위상이 국내에서 떨어진 게 아니냐는 지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1970년대 우리 경제의 초창기에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면, 지금은 민간연구소나 학계와 선의의 경쟁을 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비쳐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역시 전혀 흥분하지 않은 ‘모범 답안’이 나왔다. 현 원장과 대화를 쭉 이어가노라니 그의 낙관은 경쟁과 개방이란 시장경제 원리를 믿는 경제학자로서의 신념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감(感)이 오기 시작했다. 내친 김에 경제현안도 몇 가지 물어보았다.

― 1분기(1~3월)에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산업동향과 경제성장률 수치가 나왔습니다. 정부가 얼마전 9000억원에 달하는 재원을 탈탈 털어 투자와 일자리 부문 대책을 내놨습니다. 이어 강남3구 부동산 규제 완화 등 경기와 관련된 미세조정을 할 예정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우리뿐 아니라 많은 나라가 해법을 2가지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조조정이고, 또 하나는 긴축 즉 재정의 건전성입니다. 양쪽의 큰 방향은 유지되는 선에서 경기안정성을 찾아야 합니다. 정부가 재정을 통해 경기를 진작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묶어놓은 제도를 푼다든가, 활성화를 위한 규제완화, 이런 쪽으로 가닥을 잡는 편이 지속가능 성장의 길과 부합한다고 봅니다. 걱정은 올해 선거를 앞두고 복지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에 흔들릴 가능성입니다. 또 하나는 원래 구조조정이란 아픈 건데, 무상보육 무상교육을 주장하면서 재정건전성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틈이 생길까 하는 걱정입니다. 정부는 원칙을 강하게 지키고 큰 방향에서 확고한 메시지를 줘야 합니다.”

― 통상 쪽에서 앞으로 한미 FTA 재협상, 나아가 한·중 FTA와 한·중·일 FTA를 앞두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경제정책 중 완전히 새로운 이정표가 바로 FTA입니다. 세계무역의 후진국이 금세 선진국이 된 겁니다. 시장 확보 면에서 절대적이죠.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는 계기입니다. 한·중 FTA는 경제 외 측면도 강하죠. 우리 FTA는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생존전략입니다. 한·중 FTA에서 주의할 점은 시장경제를 하지 않는 나라와 맺는 첫 번째 FTA란 것입니다. 중국식 자본주의에서 큰 제조업은 모두 국영기업입니다. 국가가 보조금을 주는 기업과 경쟁할 텐데, 이를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에서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또 미국이 제일 걱정하는 게 중국 측의 사인과 집행이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한미 FTA 같으면 ‘협정발효=집행’인데, 한·중은 ‘발효+집행’까지 고려한 FTA가 돼야 합니다.”

현 원장은 인터뷰 내내 사생활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자녀양육 철학으로 ‘자립’을 강조했던 옛 기고문을 들이대며 캐묻자, 판사로 재직 중인 딸과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이수하고 있는 아들을 키우고 있다며, “자식 문제는 역시 (학문처럼)신념대로 되진 않더라”고 처음 껄껄 소리를 내서 웃었다.

인터뷰 = 노성열 차장(경제산업부) nosr@munhwa.com

▲청주 생(1950.5) ▲경기고, 서울대 상대(1974.2) ▲서울대 행정대학원(1976.2)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경제학 박사·1984.5) ▲행정고시 14회 ▲세계은행(World Bank) 이코노미스트(1989.9~1991.8) ▲재정경제부 예산심의관, 경제정책국장, 국고국장 등(1996.1~1999.11)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처 기획조정실장(~ 2000.6) ▲재정경제부 세무대학장(~2001.2)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원장(2002.4~2008.5) ▲공공기관(공기업·준정부기관) 경영평가단장(2008.3~2008.12)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2008.9~2009.3) ▲2009.3~현재 대통령자문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대통령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위원, KDI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