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순애(오른쪽) 할머니가 지난 10일 전남 화순군 춘양면 화림리 노재천(가운데)·구관순(왼쪽)씨 부부 집 마당에서 도리깨로 팥 타작을 하고 있다. 화순 = 곽성호기자 tray92@munhwa.com

“아줌니, 뭐 드시고 이렇게 오래 사느냐고 물어보잖여.” 이귀님(77) 할머니가 김순애(94) 할머니의 귀에 바짝 입을 갖다대며 큰 소리로 말했다. 김 할머니의 얼굴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이 할머니가 다시 더 큰 소리로 말하자 김 할머니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평생 김치하고 시래기 된장국 먹응게 오래 사는 거지.”

지난 10일 오후 전남 화순군 춘양면 화림리 광대월마을의 노재천(82) 할아버지 댁에 마을 어르신 몇 명이 모여들었다. 반짝추위 끝에 따뜻한 가을볕이 들자 노 할아버지는 아내 구관순(78) 할머니와 함께 마당에서 팥 타작을 했다. 황토색 개량 한복을 입고 한 손에 지팡이를 짚은 김 할머니는 마실 나온 김에 일 좀 도와준다고 마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리깨로 바짝 마른 팥 줄기를 내려치자 빨간 팥알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줌니, 뭘 도와준다고 그랬싸. 저그 마루에 가서 좀 쉬시쇼.” 이 할머니가 만류했지만 도리깨를 잡은 김 할머니 손은 멈추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마당 한쪽에 쌓인 토란을 보더니 “아따 토란 많이 캤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이 할머니가 다시 ‘통역’역할을 했다. “몸은 어디 아픈 데 없슈?” “우리 큰아들이 춘양(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 제주도를 두 번이나 보내줬제. 일본만 안 갔지 구경 안 간 데가 없어.” 김 할머니는 ‘동문서답’인 줄도 모르고 말을 끝내고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 할머니는 “이 아지매가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정신은 총총하지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인근 도암면에서 꽃다운 17세에 이씨 가문에 시집와 ‘도암댁’으로 불렸다. 제법 사는 집이어서 ‘큰 머슴 작은 머슴을 두고’ 살았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3남1녀 모두 잘 키웠다. 광주에 사는 큰아들 이길수(70)씨는 교사로 정년 퇴임했다. 주말마다 어머니 집을 찾는단다.

이 할머니는 “큰아들이 토요일마다 와서 저그 차로 아지매 데리고 춘양에 가 목욕도 시켜주제, 병원에도 데려다주제. 아주 효자로 소문났지라”고 다시 거들었다.

혼자 사는 김 할머니네 집 전화기는 ‘특수 장치’가 부착돼 있다. 저녁 때 큰아들이 전화를 하면 전화기 1번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서울에 사는 둘째 아들이 전화 하면 2번 불이 깜빡인다. 못 듣는 김 할머니를 위한 장치다. 4번까지 자식들 순번이 매겨져 있다. 전화를 받으면 자식들은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하고 안도한다.

김 할머니는 못 들어도 몇 번 불이 깜빡이는가를 보고 전화를 들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한다.

한번은 초저녁에 김 할머니가 깜빡 잠이 들어 전화를 못받자 큰아들이 깜짝 놀라 이 할머니 집에 전화해서 어머니 안부 확인을 부탁한 적도 있다. 이웃분들과 자식들 덕에 김 할머니는 고령에도 큰 불편 없이 살고 있다.

노 할아버지 댁에서 1분 정도 거리인 김 할머니 집에 가자 마루 위 벽에 가훈으로 보이는 ‘충효전가(忠孝傳家)’라고 쓰인 액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식들의 어머니 사랑과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어디에서 연유한지를 짐작하게 했다.

김 할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하면서도 쉼 없이 몸을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매일 마을 산허리 쪽에 있는 저수지까지 2㎞ 정도 되는 길을 운동 삼아 왕복한다고 한다. 집 앞 텃밭에서 고추와 상추, 파 등을 가꾸고 이웃간에도 자주 왕래한다.

노 할아버지 댁도 ‘효자 집안’으로 마을에서 유명하다. 삼형제를 둔 노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로 허리가 휘었지만 자식들만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다.

광주에서 목포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하는 둘째 아들이 주말마다 갑오징어와 명태 같은 ‘귀한 것’을 아버지 드시라고 사온다고 한다. 안산에서 경찰을 하는 막내아들도 매일 안부 전화를 잊지 않는다.

몸은 괜찮으냐고 묻자 노 할아버지는 “건강은 아직까지 괜찮지라. 근데 그전같이 일은 많이 못하제. 그래도 경운기 몰고 일 좀 하려고 하면 둘째 아들이 통 못하게 하지라”고 했다. 뭘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무 게도 잘 먹지라. 끼니마다 국을 먹는디 ‘실거리국’이라고 무잎사귀국을 잘 먹지라”고 답했다.

맑은 하늘 아래서 팥 타작을 하는 김 할머니와 노 할아버지 부부를 보며 인정 많고 푸근한 농촌 이미지를 마음 속에 오래 새겼다.

화순 = 김충남기자 utopian2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