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의 소리꾼 ‘좌장’인 90세의 박병임(오른쪽) 할아버지가 지난 9일 전통민속전수관에서 판소리 열두 마당 중 하나인 숙영낭자전의 한 대목을 부르고 있다. 진도 = 곽성호기자 tray92@munhwa.com

‘아리고 쓰린 진도 소포마을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귀에 박히고 장구를 스치는 손놀림이 가슴을 때린다. 모든 주민이 (민요) 단원이고 소리꾼이라 대파 손질로 바쁜 아낙네의 손짓이며 지나가는 노인네의 굵은 목젖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이 작은 마을은 오늘도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농촌건강장수마을 소개 책자에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 마을을 소개하는 서두 부분이다. 이를 압축하면 ‘삶의 애환을 소리 가락으로 신명나게 풀어내는 마을’이다.

지난 9일 찾아간 이 마을 입구에 있는 ‘전통민속전수관’. 전수관 안에는 한복에 하늘색 두루마기를 입고 상의 주머니에 부채를 찔러 넣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분이 앉아 있었다. 소포마을 소리꾼의 ‘좌장’격인 올해 90세의 박병임 할아버지가 그 주인공이다. 병풍을 배경으로 앉아 있던 박 할아버지가 김치 한 조각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을 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수(鼓手)는 판소리 심청가와 흥부가 완창으로 이름을 날린 명창 이민석(71)씨가 맡았다. 북채를 잡은 이씨의 손과 박 할아버지의 얼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얼∼씨구나/절∼씨구나/황금꽃이 일어나고/황금물결 일어났네…빛나거라 우리나라/장하도다 우리나라/우리가 다같이 힘써/새로운 국가 맞이하세/지화자 좋을씨구.’ 박 할아버지가 느리고 구성지면서도 때론 파워풀한 ‘8·15 해방가’를 10여분에 걸쳐 판소리로 풀어냈다. ‘얼씨구’‘어∼이’‘하∼’하는 이씨의 추임새가 흥을 돋웠다.

박 할아버지는 주민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듣자 신이 난듯 소주 한 잔을 더 청했다. 이번에는 판소리 열두 마당 중 하나인 ‘숙영낭자전’차례였다. ‘적적한 심야간을 어찌 보내는가/아이고 불쌍한 내자식들아…후회가 되면/죽지 말고 잘 살아라.’고음으로 치달을 땐 박 할아버지의 목젖이 떨리면서 부채를 잡은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인(藝人)’의 경건함이 얼굴에 묻어났다. “그랑게 오늘은 내가 부른 게 아니라 도깨비가 부른 것이여. 5년 만에 소리를 처음 하는 거니께.” 소리를 마친 박 할아버지는 순진무구한 어린이 같은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박 할아버지는 5년 전 진도에서 열린 ‘전국 남도민요 경창대회’에서 진도 육자배기와 흥타령으로 노장부 최우수상을 탔다. 그와 소리와의 인연은 지금부터 6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말 박 할아버지는 남도 마을을 돌아다니며 판소리를 가르치고 전수한 명창 이병기 선생과 진도 소리의 주류인 ‘명고(名鼓)’ 김득수 선생에게서 동학 10여명과 함께 배웠다. 그때 동학들은 모두 떠나고 이병기 선생의 제자로는 박 할아버지가 유일하다. “그때 장끼전, 전우치전, 장화홍련전 같은 판소리 열두 마당을 배웠제. 그뿐이 아녀. 오만 소리는 다 했제라.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같은 다섯마당은 좋은 대목만 뽑은 ‘눈대목’을 선생이 가르쳐줬제. 곡식이 없응게 낮엔 일하고 밤에만 했는데 3년 시한(時寒·겨울의 진도 방언)에 걸쳐 배웠지라.” 그 시절 배운 소리가 그 후 삶의 뿌리가 됐고 활력소가 됐다. “소리는 갈고 닦아야 뒤야. 소리를 배울 땐 입을 가만 안놔둬. 똥 누면서도 연습을 했당게. 지금도 기분이 좋으면 저절로 흥얼거리게 된당게.”

박 할아버지는 6년 전까지 농사를 지을 정도로 건강하게 살아왔다. 지금도 걸을 때 다리가 조금 불편한 것을 빼곤 건강한 장수를 하고 있다. 그는 장수 비결에 대해 “딴 거 없어. 장수는 체질 때문여. 사람은 속병만 없으면 건강한 거여. 다리 좀 아픈 거는 견디고 살 수 있잖여. 속은 아무 일 없어. 밥 한 그릇 다 먹는당게.”

노양금(84)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는 박 할아버지는 4남4녀를 뒀다. “손자손녀들이 50명이 좀 못뒤야. 참 몰독하제(많고 풍부하다는 진도 방언).” 진도읍에 사는 셋째 아들이 반찬을 많이 갖다준다고 한다. 음식은 생물(생선)을 좋아하고 소뼈를 고아 먹으면 몸에 좋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하고 운동 삼아 들녘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마을회관에 가서 다른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고 집에 와서 옥편을 놓고 ‘자습’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남도 소리 기행 체험이 끝나나 했더니 ‘어머니 전통민요 노래방장’인 한남례(여·78)씨가 베틀을 짜면서 부르는 ‘베틀노래’와 ‘흥그래타령’을 이어갔다. 이민석씨도 자신의 주특기인 판소리 심청가의 심봉사가 물에 빠지는 장면을 구성지게 불렀다. 밖에는 초겨울 바람 소리가 드셌지만 남도 소리 자랑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진도 = 김충남기자 utopian2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