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올해 84세의 김남옥 할머니가 지난 2일 강원 평창군 평창읍 대하리 평창 이씨가 15대째 살고 있는 전통가옥 마당 평상에 앉아 고추를 다듬고 있다. 평창 =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지난 2일 찾아간 강원 평창군 평창읍 대하리. 세종실록 153권 지리지 강원도편에 강원도 5대 명산으로 꼽힌 거슬갑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두르고 앞에는 늦가을 볕을 받아 연두색 빛깔이 더 짙어진 평창강이 유유히 흐르는, 화폭 속에서나 볼 법한 마을이었다. 인터뷰 대상자인 김남옥(84)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마을회관에서 조그만 개천을 따라 5분 정도 걸어올라가니 고색창연한 고택(古宅)이 눈앞에 나타났다. 완만한 경사를 이룬 1000㎡ 정도의 대지 위에 지어진 집이었다. 대문 앞 우측에 ‘평창 대하리 전통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8호)’이라는 제목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450년 전에 처음 지어진 이 집은 평창 이씨가 15대째 살고 있는 종가(宗家)로 순조 25년인 1895년경 화재로 다시 고쳐 지어졌다고 한다. 입간판에는 “지붕 망와에 ‘도광 을유(1895년)’라고 쓰여 이때 만들어진 기와가 계속 사용되고 있다…마루가 중앙에 있는 결집구조로 영서지방의 전형적인 민가”라고 쓰여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김 할머니가 마당 평상 위에서 새빨갛게 잘 말린 큼직한 고추를 다듬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서는 시든 머루 덩굴이 늦가을 정취를 더했다. 백발에 돋보기 안경을 쓰고 체크무늬 외투에 꽃무늬 스카프를 맨 단정한 모습이었다.

할머니에게 ‘이 넓은 집에서 혼자 사는데 외롭지 않느냐’고 물었다. “외롭긴 뭐가 외롭대유. 23살에 강릉에서 출가해 60년 이상 산 집이래유.” 남편인 이창익씨가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 아들 며느리 내외, 손자들과 한동안 살다 혼자 산 지 14년이 됐다.

‘ㄱ’자 모양의 안채 툇마루에 보라색 예쁜 고무신이 세워져 있었다. 누구 거냐고 묻자 “내꺼래유”라고 하면서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

‘곱게 늙으셨다, 미인이시다’라고 한마디 하니까 김 할머니는 “미인은 뭔 미인이래유. 염색도 안 하고 그러는데. 평창 장에 가면 읍내에 있는 대성약국 아저씨가 나더러 ‘이쁜 할머니’라고 불러요”라고 말하며 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다고 하자 “마음이 편하니까 만날 웃음이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고추를 다 다듬은 다음 집 구경을 시켜준다고 일어났다. 대문과 연결된 사랑채와 곳간채 옆을 지나니 곳간과 장독대가 나타났다. 곳간 옆 담장 밖에는 수백년 된 아름드리 밤나무가 고택의 수호신인양 서 있었다.

“이게 간장이고 저건 된장이래유. 고추장 하고 막장도 있고. 우리 며느리 하고 같이 담근거래유.” 김 할머니는 지금은 쓰지 않아 녹슨 자물쇠가 매달린 광을 열어 보였다. 책에나 나오는 뒤주가 수십년 전 모습 그대로 놓여 있었다.

김 할머니는 점심을 먹으러 마을 회관으로 걸어 내려갔다. 건강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김 할머니는 저녁 9시쯤 잠자리에 들어 오전 4시면 일어난다고 한다. 새벽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성경을 본다. 50세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 현재는 평창 읍내 한 교회의 권사다. 날이 밝으면 집 인근에 있는 텃밭에서 풀도 뽑고 옥수수, 고추, 상추, 깨 등을 가꾼다. 김 할머니는 올해는 깨를 두 말이나 했다고 자랑했다.

무릎이 좀 아픈 편이지만 집에 있지 않고 마을 회관까지 걸어가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마을 여기저기 마실을 자주 다닌다고 한다.

뭘 좋아하느냐고 묻자 “나물이 최고지. 고기는 싫어. 밥은 조금씩 먹어. 많이 먹으면 안 좋아”라고 했다. 특히 무, 배추, 곤드레 나물, 상추 등을 좋아한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평생 뭐가 가장 좋았느냐고 묻자 “가난해 배고픈 적 없고 옷 없어 못 입은 적 없었더래유. 아주 잘살지도 못살지도 않은 그저 평평하게 살아왔어요. 이 마을이 공기가 좋아 오래 사는 것 같어요. 그리고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죠”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마을 소개 책자에 이런 글을 남겼다.

“23살에 시집을 왔는데 종꺼정 12명이 사는 거야. 우리 집은 땅도 있고 종도 있고 부잣집이었는데 강냉이 갈아서 밥해 먹었어. 쌀밥 먹는 사람이 없었어. 참 산골이 아주 무한 산골이었어…이 집에 혼자 산 지 13년이 넘었어. 신앙이 있으니까 혼자 살아도 안 무서워. 이제는 나이 먹으니까 기억이 흐리멍텅한가. 근데 옛날 방아 찧는 꿈을 다 꾸킨다. 이상하게 예전 친정에서 살던 꿈을 많이 꾼다. 신기하지. 꿈은 세월을 거꾸로 가니.”

평창 = 김충남기자 utopian2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