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진=심만수기자

한국영화계의 ‘거장’ 임권택(71) 감독이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의 촬영을 마쳤다. 지난 2일 ‘천년학’ 마무리작업에 여념이 없는 임 감독을 만나 그의 50년 영화인생과 한국 영화계의 현안 등에 대해 들어 보았다.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의 촬영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천년학은 서편제의 후편인 셈인가요. 언제 개봉할 예정입니까.

“촬영은 모두 마쳤고 지금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4월 중순쯤 개봉할 예정입니다. 남도창을 소재로 쓰인 작가 이청준의 연작 소설이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입니다. 애초에는 3편 묶어서 하려 했는데 영상 처리 문제가 있어 서편제와 소리의 빛 둘만 갖고 끝냈습니다. 서편제가 나온 지 벌써 13년이 지났지만 100번째 작품이니까 어렵긴 하지만 해보자 하고 덤벼들었지요. 후편이라도 서편제와는 많이 달라진 영화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게 다른가요.

“영화를 끌어가는 방식과 얘기가 다르다고 보면 됩니다. 서편제는 관객이 우리 판소리를 빨리 이해하고 감흥을 느끼도록 하는 데 주력했지만 천년학은 사랑 얘기를 위주로 풀어갔다는 점에서 많이 다릅니다.”

―제작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투자사가 붙지 않아 제작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투자를 꺼린 것은 흥행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본 때문이겠죠.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배우들을 캐스팅 했으면 나았을 텐데 그런 배우들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만든 서편제나 장군의 아들이 모두 기존의 흥행 기록을 경신했지만 유명한 배우를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와서 투자사들이 연기자에게 더욱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배우 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도 한국 영화 산업이 당면한 큰 문제 중 하나라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영화계 돌아가는 게 문제가 있습니다. ‘스타’만 데리고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명백히 잘못됐는데도 그런 연기자들에게 치우치다 보니까 배우의 몸값을 엄청 올리고 제작 비용까지 덩달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요즘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잘 나가는 배우를 캐스팅하려면 얼마나 들지요?

“한편당 7억원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흥행이 잘 되면 추가로 주는 돈도 있고 전반적으로 너무 올랐습니다.”

―감독 데뷔작이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라는 영화더군요. 어떤 내용의 영화였습니까.

“독립군이 독립운동을 서울 쪽에서 하다 쫓겨 압록강까지 도강하는 일종의 액션물이었습니다.”

―만다라나 씨받이 등의 작품으로 주요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장군의 아들이나 서편제로는 흥행기록을 경신하는 등 한국영화의 국제화와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감독님의 영화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동안 인본(人本)을 테마로 삼는 영화를 많이 해왔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한국 사람들의 삶, 많은 수난사를 겪은 삶을 인본이라는 틀 속에서 다뤘습니다. 선조들의 예술을 통해 한국인의 문화적 개성, 삶에서 우러나는 정서와 감흥 이런 것들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우리의 판소리나 이런 것들이 외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생경한 문화인데 그런 것들을 다듬어 세계로 내보내 보편성을 갖추려는 일을 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 툭하면 1000만명씩 관객을 모으고 주요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후배 감독들과 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서 나는 도저히 저런 영화를 찍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체험한 세대입니다. 그런 시대를 거치면서 세상에 대해 주눅이 들고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할까요. 저 감독들은 그런 체험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운 의식으로 영화를 할 수 있는 것이죠. 내가 태극기 휘날리며를 감독했다면 그렇게 못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계층간·세대간 갈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요.

“영화에 국한시켜 얘기하자면 저도 전쟁영화를 찍어봤지만 형제가 한 부대, 한 소대에 함께 근무한다는 설정을 못하는 거죠. 형이 훈장을 받으면 동생을 제대시켜 준다? 그것도 마찬가지죠. 전장에서는 전투개시선이라고 통상적으로 교전이 이뤄지는 거리가 있거든요. 미국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면서 이것을 좁혀 놓고 더 박력있게 만들고 하는데 우리가 체험하거나 알고 있는 총격전이나 실제 전투 장면을 훨씬 넘어서니까 아 거짓말이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물론 영화 자체가 거짓말이긴 하지만요. 우리 세대는 이런 한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런 영화를 못 찍는 것이죠.”

―관객 1000만명을 넘는 영화가 매년 나오는 걸 보면 영화시장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1000만명은 우리는 상상도 못한 숫자였는데… 복합관이 생겨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시설이나 환경을 만들어 놓으니까 관객이 몰리는 여건이 마련된 것 같습니다. 또 젊은 감독들이 영화를 세련되고 재밌게 잘 만드는 것도 분명합니다. 여기에 영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영향도 있고요. 하지만 1년에 한두 개만 크게 흥행하지 나머지 작품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한국 영화는 적자입니다. 수입에 비해서 제작비가 많이 드니까요.”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왜 반대하십니까?

“한국 영화가 지금은 잘 되고 있지만 언젠가 침체기에 빠졌을 때는 보호막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재기할 대비책도 전혀 없이 언젠가는 스크린쿼터를 완전히 없애자고 할 것입니다. 투자사나 극장은 돈벌이가 목표입니다. 한국 영화가 침체기에 들었을 때 과연 투자사나 극장이 국산 영화를 필요로 하겠는가가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 영화가 다시 일어설 근거가 없어집니다.”

―45년 동안 100편의 영화를 감독하는 데 스크린쿼터의 도움이 있었나요.

“스크린쿼터가 없었다면 저는 감독으로 살아올 수 없었을 겁니다. 제 영화는 흥행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찍은 게 거의 없었습니다. 장군의 아들은 특이한 경우지만 서편제는 우리도 흥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 못했습니다. 서편제처럼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만들다가 뜻밖에 히트작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만들려면 투자사가 달려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영화는 의무 상영 기간을 채우기 위해 찍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관객 1000만명이 넘는 영화가 속속 나오고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진 탓일까요. 오히려 젊은 감독들이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 더 자유로운 태도인 것 같습니다.

“미국 영화가 슬럼프에 빠져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지 의문입니다. 자본·인력·최첨단 과학·기계 등 인프라가 좋은 것이 할리우드 영화의 장점입니다. 요즘 문제는 소재의 고갈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군사정권 시대에 있던 영화에 대한 규제가 풀리니까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를 만들어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소재도 많지 않습니다. 저는 한국 영화의 장래를 안심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쓸데없이 젊은 사람들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이른바 ‘한류’의 배경은 한국 문화의 우수성라고 보십니까?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는 이미 서구에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문화는 아직도 너무 생경하고 세가 적은 문화입니다. 근자에 와서 한국 영화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중국이나 일본 영화가 알려질 대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만이 품고 있는 감흥이나 문화 그런 것들이 이제 좀 알려지는 단계인데… 그게 얼마나 갈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화계는 상당히 매력있는 곳인데요, 영화를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 오지 않나요.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무엇입니까.

“저한테는 별로 안 찾아오는데요. 저는 제 영화하는 데 턱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없습니다. 저 자신이 영화 만드느라고 허우적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천년학의 개봉을 기다리는 관객들을 위해 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팁을 주신다면?

“영화 속 인물들은 소리판에서의 삶·배역과 판소리가 맞물려서 극적인 상승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춘향전이라고 하면 이도령과 춘향의 얘기지만 그 안에서 쓰여진 소릿말들이 이 사람들의 삶과 극적으로 맞물려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는 감흥의 세계와 영상이 통틀어 한편의 한국화라는 느낌이 들도록 찍었습니다.”

―5월 칸 영화제에 출품하시나요. 101번째 영화는 구상하고 계신지요.

“그럴 예정입니다. 칸에서도 제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기대도 하고 있고요. 101번째 영화는 천년학 끝나고 생각해 봐야죠.”

―100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는 누구입니까.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는요.

“딱히 말하기 힘들어요. 100편이나 되니…. 다들 열심히들 했고, 거기다 대고 누구는 잘하더라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솔직히 저는 제 영화를 잘 안 봅니다. 녹음하고 편집하면서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인데요. 극장에서 보면 화가 납니다. 왜 저렇게 찍었을까…. 그래도 서편제와 취화선은 얘기하고 싶습니다.”

―영화의 사회 교육적 역할을 강조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교육적 역할이라기보다는 사회에 대해서 미치는 영향이 무척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화가 기본적으로는 아주 영향이 큰 매체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서 밝고 건강한 기여를 하길 바랍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 때 투표는 꼬박꼬박 하시는 편입니까?

“그럼요.”

―연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다음 대한민국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국민이 불안해 하지 않는 그런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편안하게 해주고….”

인터뷰 = 이상호 전국부장 soo-lj@munhwa.com
정 리 = 장석범기자 bu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