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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는 ‘원로 부재’의 한국 사회에서 두루 존경을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명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청년같은 기백으로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상임대표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서 전 총재를 만나 국가적 현안과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 등에 대해 들어 보았다.
―어림잡아 10개가 넘는 직함을 갖고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원로이신데요. 요즘은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1994년 결성된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의 대표로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재외동포교육재단 이사장으로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약 700만명의 해외동포 2, 3세들에게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며 다민족사회와 관련, 국내의 혼혈인 가족을 돕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또 양심적 지성인을 위한 월간지 ‘우리길벗’도 발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아 사람들을 만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정체성의 요람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변변한 기념관이 없다 보니 의의를 기리는 데 부족함이 있고 자손들도 섭섭해합니다.”

―요즘 원로들끼리 만나시면 나라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이념적으로 양극화되어 대립하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닥친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나라를 21세기 세계화시대에 맞는 선진화된 국가로 만드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도 시계바늘을 과거로 되돌려 상해 임시정부나 해방후 건국과정과 같은 이념 대립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해진 것 같습니다. 이 정부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습니까.

“사람들이 만나면 대통령 욕하는 게 유행처럼 돼 있는 게 현실인데…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저는 노 대통령이 마무리를 잘하기를 바랍니다. 다음 정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말입니다.”

―신년 벽두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의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야가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나 같은 비정치인이 말하기 어렵습니다.”

―평생 적십자와 흥사단운동 등 사회봉사 활동만 하시다 김대중 정부 들어 새천년민주당 초대 대표로 정치를 하셨는데요.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일입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도 나더러 국회의원이 되어 도와달라고 했지만 일생 정치는 안 하겠다는 신념 때문에 사양했는데, 김대중 대통령 때는 사절하기 어려웠습니다. 내가 흥사단 이사장을 할 때에 그분이 창당대회장을 못 얻어 곤란할 때 흥사단 강당을 빌려줬고 내가 KBS 사장을 할 때에는 그분이 자주 나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는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이희호 여사와는 해방후에 조선민족청년단(족청) 등의 활동을 함께 해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기는 하지만, 대표로 영입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과정에서 정균환씨가 몇 번 와서 입당을 권하더니 창당 임박해서는 비서실장도 보내 대표수락을 간청했습니다. 번번이 사양하면서 많은 고민 끝에 김대중 대통령은 사선을 몇 번씩 넘으며 민주화와 평화운동을 해왔고 이제 국민이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했으니 그가 임기 5년을 잘 마쳐야 될 것 같아 수락했습니다. 그때 여당 국회의원 30여석이 모자라 과반수에 못 미쳤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만나 나는 상처를 받지만 나라를 위해 하느님의 명령으로 알고 선거 때만 돕기로 하고 수락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민주당 대표를 11개월 동안 하면서는 지금처럼 여야간에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민주당을 창당하다시피 하셨는데 현 집권 세력이 민주당에서 분당하고 나와 열린우리당을 만들 때는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제가 민주당과 인연이 있어 그런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아주 안 좋더군요.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더라도 민주당을 깬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 분명합니다.”

―올해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차기 대통령은 어떤 자질을 갖춘 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북한 핵문제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혼미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북한 문제로 한반도에서 충돌하지 않도록 외교적 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미국과는 기존의 친선 유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 일본과도 이제는 화해를 했으면 합니다.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도 잘 유지해야 하는데 스위스 같은 자주성이 제약된 중립이 아닌 중도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잘 풀어가는 것도 필요하겠죠. 경제를 잘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중요하고 우리의 모든 문화와 이념, 종교 등이 너무 경직되거나 원리주의로 흐르지 않고 다양성과 실용성을 갖출 수 있는 정신적 리더십도 요구됩니다. 분열의 상징인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선(善)진화되어 화해와 통합을 이룸으로써 반기문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된 것처럼 세계 문명에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거론되는 대권 후보들은 그 같은 비전이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특별히 이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제가 사회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공교롭게도 여야를 막론하고 지금 대권주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모두 잘 아는 편입니다. 고건씨는 40년 전부터 친교가 있고 이명박 전 시장이나 손학규 전 지사는 교회쪽 활동을 하면서, 박근혜 대표도 적십자 활동을 하면서 육영수 여사와 함께 인연이 깊습니다.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의장이나 정동영 전 의장 등은 민주당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개인별로 제 나름대로의 평가는 있지만 공개할 수는 없는 일이고 아직 1년 가까이 시간이 남았으니까 좀더 두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1988년부터 2년간 KBS 사장을 지내셨습니다. 요즘 공영방송의 이념적, 정파적 공정성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습니다.

“작년에 ‘서울 1945’ 인가 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문제가 많다고 느꼈습니다. 해방후 정국과 6·25를 다루는데 대한민국 건국주역들에 대해서는 나쁘게만 묘사했고 상대방은 항일연군 출신들을 등장시켜 용감성을 발휘하는 등 일방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KBS쪽에 지적을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KBS 사장을 할 때는 시청료 거부 운동이 없었습니다. 공영방송답게 매사에 공정하고 보편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데 신앙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저는 3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보통의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가정적으로는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묘향산 남쪽인 제 고향 평남 덕천은 겨울이면 유난히 눈이 많이 왔는데 그곳에서 송정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시절 숭실전문학교에서 발간한 ‘아이동무’란 기독교 아동 잡지에서 처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17세에 묘향산에 들어가 있을 때 선천에서 온 홍여경이라는 독실한 기독교인에게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후 톨스토이 문학에 심취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생각의 폭이 점점 넓어졌고 특히 일제시대와 광복후의 혼란, 6·25전쟁 등 험난한 역사를 거치며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현재 매진하고 계시는 공동선 운동은 어떤 것입니까.

“인류의 공동선은 우리 인류의 양심과 지혜를 깨우쳐 물질문명의 역기능을 막고 초록별 지구촌의 생명질서 존중과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여 참된 선(善)진문화를 창조하며 생활화하는 운동입니다. 인간의 상생복지, 민주주의, 평화, 환경보전 등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누려야 하며 그 밑바탕에는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사랑과 자비, 헌신, 봉사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가르치는데 저는 이 진리의 핵심이 ‘사랑이요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랑이 사물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존재를 삼라만상 속에서 찾아내게 합니다. 그동안 공동선 운동에 많은 분들이 사랑과 은혜로 결실을 거뒀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든을 넘기시고도 무척 건강하신데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내게 일을 맡겨주실지 모르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동고동락했던 많은 동지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건강하게 사회에서 직책을 맡아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인터뷰=이상호 전국부장 soo-lj@munhwa.com

◆약력
1923년 평남 덕천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인 1946년 상경,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한적십자사에 들어가 30년 동안 근무하며 청소년국장과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 후 흥사단 이사장(1983년), KBS 사장(1988년), 부정방지대책위 위원장(1995년) 등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대표(국회의원)를 지내고 2001~2003년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수행한 뒤 지금은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상임대표와 재외동포교육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평화의 계단’‘부름받아 걸어온 길’‘뜻을 따라 가야할 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