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메이데이(노동자의 날)가 없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꽉 쥘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식들이 학교에 다녀도 뭣 한가지 마음에 드는 것을 사주지 못합니다. 남은 것은 몸뚱이 하난데 맘 먹은대로 일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금요일이지만 쉬는 날 오늘 하루를 꽉 ! 움켜쥐고 싶어졌습니다. 6월1일 오늘은 분명 쥔 데이(June Day〓주인이 되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얼마전 전북 자활인 대회에서 남원자활후견기관 양기운(50) 관장이 낭독한 이 글은 빈곤탈출을 위한 자활의 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케한다. 이일 저일 손대다 적은 밑천조차 날리고 빈곤층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하루를 꽉 움켜쥐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으로 집약되는 70년대식 가난과 달리 요즘의 가난은 산업재해, 가정 해체 이외에도 일에 대한 집중력부족 등 정신적 요인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원시에서 곡성쪽으로 20분만 달리면 각종 근로사업으로 자활의 길을 힘차게 만들어가고 있는 남원흙살림 현장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축사, 눈을 시원하게 하는 푸른 밀밭, 유기농 채소를 키워내는 비닐하우스 등에서는 작업을 나누는 사람들의 손길이 아침 일찍부터 바빠진다.

남원자활후견기관은 지난 6월 자활기관으로서는 국내 첫 유기농생산공동체인 흙살림새벽공동체를 출범시켰다. 새벽딸기 브랜드로 서울 시장에 파고들어 성공을 거두는 등 남다른 노력이 뒷받침이 됐다.

남원자활후견기관 양기운(50)관장의 농업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는 농가는 3개의 축산 농가를 비롯해 16명에 달한다. 매출규모는 연간 5억원. 남원흙살림새벽공동체 사람들은 서로를 돕는 공동체의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활의 그물을 짜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 분리 수거한 음식물 쓰레기로 순환농법을 실천에 옮기는 등 소량처리 개념으로 지역 농업에 순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남원흙살림새벽공동체와 보건복지부가 지원하는 남원자활후견기관은 국내 자활기관 초유의 실험에 나서고 있다.

흙살림공동체는 남원시 아파트단지에서 밥류와 반찬류를 분리수거해 이를 통해 유기축산을 시도하고 있다. 밥류와 반찬류를 수거하는 개념은 골치아픈 음식물 쓰레기 처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주부들의 ‘손습관’을 바꾸는 것이 그 요체다. 하루 한 차례 밥과 반찬 쓰레기를 나눠서 배출하면 음식물이 농업을 되살리는 자원으로 재탄생한다.

남원시 호반아파트에서는 밥류와 채소 및 과일, 국건더기를 포함한 반찬류, 절임류 4가지로 분리 배출하고 있다. 하루 두 차례 음식물 쓰레기 수거와 운반 등은 자활후견기관의 되살림 사업단이 맡고 있다. 음식물 재활용을 위한 대량처리 시스템은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야 하고 운영과정에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 아파트 1000가구의 음식물 쓰레기는 1t에 불과하지만 축사는 물론 6㏊의 논밭을 경영하고 있다.

수거한 음식물 쓰레기는 축사와 퇴비장 시설로 옮긴 뒤 일부는 직접 돼지 등 가축들에게 먹인다. 일부는 바로 퇴비 원료로 쓴다. 돼지와 오리로부터 수거된 깔짚을 발효시키고 가축에게 주기 어려운 음식물 쓰레기를 혼합 처리해 완숙퇴비를 만들어 회원들의 논밭에 활용하고 있다.

빈곤 탈출의 방법으로 도시의 음식물 쓰레기 문제 해결과 유기축산, 유기농업을 연계하는 도-농협동형 ‘남원식 모델’은 이 시대를 짓누르고 있는 가난 문제 해결에 있어 희망의 기운을 북돋아준다.

이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양관장은 “농업이 시설화, 규모화, 현대화로 치닫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지리 여건상 소규모 가족농과 수작업 중심의 친환경유기농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원흙살림공동체를 살리는 힘은 공생의 독특한 문화다.

원들 각자에게 생활이 안기고 지나간 화상(火傷)이 많지만 이를 딛고 자활의 길에 나선 흙살림새벽공동체 사람들과 남원자활 후견기관 작업장 사람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한 회원이 그날 일을 덜하더라도 이를 탓하지 않고 집안에 아픈 문제가 있을 것이라며 앞다퉈 서로 도와주려한다는 것. 경쟁이 토대가 되는 요즘 사회 풍토에서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2년전부터 새벽공동체에 합류했습니다. 일일이 풀을 베고 김을 매야 하는 힘든 유기농 일을 하면서 새벽 3시30분에 나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곤 했지요. 초기에는 서로간에 갈등이나 힘든 일도 많았지만 이제는 일터로 나오는 것이 재미있기만 합니다. 누가 아픈 사정을 털어놓으면 서로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한 감정을 느끼지요. 몇년전 자기공명영상(MRI)촬영에서 허리 디스크가 있다고 했는데 즐겁게 일하다 보니 허리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새벽채소 일은 물론 작업장 일꾼들을 실어나르는 봉고차 운전기사 역할까지 맡고 있는 신허신(여·39)씨의 얼굴은 참 밝아보였다.

흙살림새벽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A(57)씨도 “이미 고인이 된 시아버님과 장남인 남편이 너무나 술을 좋아해 시집살이 30년동안 술과의 전쟁으로 어려웠고 가정경제를 가녀린 여자의 어깨에 둘러메야 했지만 이제는 일하는 것이 신난다”며 “건강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약하고 힘이 부치는 사람을 밥상에서처럼 생각해주는 밥상공동체가 따로없다”고 말했다.

같은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새벽에 상추 재배 등을 할 때 가장 먼저 질척하거나 웅덩이진 곳에 앉는 솔선수범하는 회원이 하나 둘 생기면서부터였다는 것. 결코 티내지 않고 힘든 일을 먼저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여기에 공동체 회원들이 감동받는 찐한 장면이 연출되면서 공동체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남원흙살림새벽공동체 김종기(55)대표는 “쌀을 포함, 상추·고구마·포도등 대부분의 품목이 무농약·유기농인증을 획득하는등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기농이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다”며 “정성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채소 를 따고 있으며 이제는 서울 일변도에서 탈피해 남원지역 판로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 관장도 “절임류(소금) 쓰레기와 그렇지 않은 쓰레기의 분리 운동을 시민계도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처리하는데 지역의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경우 사회적 일자리 창출의 폭발력을 갖게 될 것”이라며 “공동화되고 있는 준산간 마을을 복원하는 중장기 프로젝트와 연계할 경우 커다란 잠재력이 있다”고 말했다.

도시의 음식물 쓰레기 처리 등 도시 환경문제 해결과 빈곤탈출 프로젝트인 자활, 농민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기농업 등 세가지 난제를 한꺼번에 끌어안고 순환형 경제를 만들어내는 남원흙살림은 작디 작은 공동체다. 하지만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역동적인 순환형 경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바람 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전국부차장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