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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 - ‘스파이’의 세계

현지인 등으로 위장한 블랙요원
실명 포함 정보 北에 유출 정황
해외활동하던 수십명 급히 귀국

‘미래전’으로 고도화되는 추세
영상·신호정보 등 활용 일상화
NGO·테러단체 등도 뛰어들어

美 ‘9·11’ 후 정보개혁법 제정
방첩·안보 체제 등 전면 재정비

최근 대북 첩보전쟁 최전선에 있는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해외 정보요원(IO)의 실명까지 포함된 인간정보(HUMINT·휴민트) 핵심 기밀 정보들이 대거 북한으로 넘어간 정황이 지난 6월 국가정보원 등의 사이버 활동 과정에서 발견돼 국가 정보라인에 초비상이 걸렸다.

주재국 정부에도 명단을 통보하고 해외공관 등에 공식 파견돼 외교관 신분으로 공개 활동하는 ‘화이트 요원’뿐 아니라 유학생·주재원 등으로 체류하며 다양하게 신분을 위장한 비밀요원인 ‘블랙 요원’ 정보까지 유출돼 중국·러시아와 몽골, 동남아 등지 블랙 요원 수십 명이 급히 귀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같은 일은 한국만 겪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북한은 물론, 전 세계 도처에서 스파이(spy)들이 암약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격화 등으로 국제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서울을 비롯한 주요국 주요 도시들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첩보전이 펼쳐지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군이자, 이제는 미래 정보전의 첨병으로 진화하고 있는 스파이의 세계를 심층 추적한다.

◇인삼공사 총판, 알고 보면 ‘블랙 요원’…美에서는 고위 외교관이 스파이 = 스파이는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간첩을 일컫는다. 전통적 스파이는 휴민트에 특화된, 인적 네트워크 형성이 중요하다. 앞서 밝힌 대로 ‘화이트 요원’과 ‘블랙 요원’으로 나뉘며, 이들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는 통칭 스파이지만 정보요원(intelligence agent)이라고도 한다. 미국 검찰이 대북 전문가 수미 테리를 기소할 당시 한국 ‘화이트 요원’에 대해서는 공작관(handler)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과거 중국 동북 3성 지역의 우리 국적 항공사 부지사장급 자리 등은 정보기관 중간 간부가 부임하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고려인삼공사 총판’ 등 간판을 달고 탈북자 관련 첩보나 대북 정보를 수집하는 거점으로 삼기도 했다. 블랙 요원의 경우 신분이 발각되면 생명이 위태로워지고 우리 측에 정보를 제공해준 북측 인사와 내부 소식통이 총살당하거나 3대가 몰살당할 수 있다.

국내에서 스파이 활동이 발각된 사례도 적지 않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참수부대 소속 대위가 북한 공작원에게 4800만 원 상당의 가상화폐를 받고 부대 작전 계획을 넘긴 사실이 적발됐다. 올해 초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 근무하던 인도네시아 근로자가 국산 KF-21 전투기 개발 정보를 계속 수집한 사례도 있었다. 앞서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에는 정보사 공작팀장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비밀요원의 정보 등을 건당 100만 원에 중국·일본에 넘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해외 주요국에서 스파이의 고위층 침투는 더욱 심각하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12월 4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남미 국장 및 주볼리비아 대사 등을 역임한 중남미 전문 외교관 마누엘 로차(74)가 40년간 쿠바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기소됐다. 최고의 방첩망을 자랑하는 미국의 정보수사 당국에 발각되지 않고 미 연방정부에 침투해 고위 외교관으로 활동해온 것. 하지만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스파이 활동의 세계가 ‘무제한(unlimited)’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리 놀랄 만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진화하는 스파이 활동…‘스파이 위성’ 등 우주영역으로까지 확장 = 최근에는 안보 분야뿐 아니라 다른 나라나 상대 기업의 경영이나 기술, 판매 정보를 알아내거나 기업에 파는 산업스파이도 성행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기술 발전에 따른 기술정보(TECHINT·테킨트)도 중요한 스파이 영역이다. 조기경보 위성, 레이더 위성 등을 통해 타국의 군사·정치·경제 정보를 수집하는 ‘스파이 위성’이 대표적이다. 인공지능(AI)·첨단 로봇이 이용되는 미래전에서 스파이 역할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은밀하고 교묘하게 영역을 확장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학계 및 정보기관에서는 21세기 스파이 활동에 5가지 대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 스파이 활동 대상의 변화이다. 첩보 활동은 전통적으로 적성국의 정보를 비합법적으로 수집·분석·역공작하는 활동이었는데, 이제는 제3국 및 우방국에 대해서도 스파이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화하고 있다. 실제로 2013년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기밀감시 프로그램을 통해 특정 대상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 본부 및 우방국의 대사관 등을 상시적으로 도·감청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둘째, 스파이 활동 주체의 다양화다. 종래에는 국가가 주체였다면, 지금은 비정부기구(NGO)나 산업스파이, 알카에다 등과 같은 테러 단체 등 비국가행위자(Non-State Actors)의 스파이 활동도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셋째, 스파이 활동 영역도 확대되면서 냉전 시기 군사정보 수집·분석을 넘어,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과학·문화에까지 공작 영역이 넓어졌다. 더 나아가 위성을 활용한 우주 공간에서의 첩보 전쟁도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다. 넷째, 수단 역시 초기에는 휴민트나 공개출처 정보(OSINT·오신트)에 의존했다면, 이제는 영상정보(IMINT·이민트)·신호정보(SIGINT·시긴트)·계측정보(MESINT·메신트) 등의 활용이 일상화됐다. 마지막으로 스파이 활동 수법 역시 온·오프라인을 배합하는 등 정교화·고도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은 방첩 활동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스파이 활동을 제어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방첩 법제를 신설·보완하고, 방첩기관의 역할을 확대하며 방첩요원을 전문화하려고 하는 것. 대표적 사례가 미국이 9·11 테러 이후 정보개혁법(Intelligence Reform Acts)을 제정해 국토안보국(DHS)과 국가대테러센터(NCC)를 신설하고, 16개의 정보공동체를 총괄하는 국가정보장(DNI)을 신설하는 등 국가 방첩·안보 체제를 전면 정비한 것이다. 유 원장은 “한국은 스파이 활동의 핵심 억지력인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했다”면서 “검거된 간첩들도 형사 법제의 허점을 악용해 석방돼 대낮에 보란 듯이 대로를 활보하는 ‘스파이 해방구’가 돼 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정충신 선임기자, 김규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