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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아름다운 巨木 정주영(1915~2001)

어느덧 30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1991년 7월 한여름 문학지 ‘심상(心象)’에서 주관해 매년 열리고 있는 해변시인학교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문학동인과 대학에서 시를 강의하는 시인교수, 시를 공부하는 학생 등 200여 명이 동행했습니다. 다섯 대의 관광버스에 분승한 우리는 한껏 초록빛으로 젖어가는 산하를 바라보며 영동고속도로를 단숨에 달려 강릉 경포초에 닿았습니다.

바닷가 소나무 숲 속에 숨어 있는 조그마한 학교는 마침 여름방학 중이어서 텅 비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실에 나뉘어 3박 4일간 숙식을 하면서 깊고 향기로운 시심의 세계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교실 칸막이를 탁 터 마룻바닥에 삼삼오오 모여 시를 나누고, 시를 읽고 노래하며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었습니다.

이틀째 되던 날 우리는 뜻밖의 귀인을 맞이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인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을 때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님이셨습니다. 차가운 교실 바닥에 참가자들이 빼곡히 앉아 앉을 자리가 없어 주저하시기에 자리를 비켜 드리고 교실 맨 끝 칸막이에 등을 기대도록 청했습니다.

회장님은 작은 친절에도 이내 감사하시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십니다. 고향이 3·8선 이북인 강원 고성군 장전읍이라 했더니 내 무릎을 치시며 살아생전 고향에 가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고향 통천과 장전은 지척 간이라 하시며 고향 사람을 만났다고 반가워하셨습니다.

이어서 회장님의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단상에 오르자마자 흑판에 한시 한 편을 적으셨습니다. 자세히 바라보니 정 회장님의 입술이 부르터 있었고, 얼굴도 많이 까칠해 보였습니다. 연유를 물으니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다녀와 어제 서울에 도착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한·중 수교 전이라 장기간 여행이 힘드시고 피로도 쌓였을 텐데 더더욱 긴요한 모임도 아니라 굳이 오시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구태여 오신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고인이 되신 박목월 선생님과 생전에 나누던 정의가 두텁고 유별나게 고향 강원도를 사랑하시는 정 회장님은 해변시인학교 초청 강의를 지키기 위해 기어이 오신 것입니다. 아무나 왕회장이 되는 게 아니라고 갈채를 보냈습니다.

‘나의 인생에서의 문학이란’ 주제 강의가 끝나고 열광적인 박수가 끝날 무렵 조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원래 부자란 잔치한다고 벌려놓고 사람을 모으는데, 우리네 인정이 잔칫날 빈손으로 가는 사람 없는지라. 많이 받아 거두고 조금만 내놓아 더 부자가 되는 법이라” 하시며 “돈은 많이 없어도 여러분에게 식사 한 번 대접하겠다”고 하시더니 바닷가 동방호텔에 초청해 곰탕과 커피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왕회장님께서는 식기를 들고 배식대에서 줄을 서 함께 식사하시고 마지막 캠프파이어까지 참석하시며 십팔번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까지 열창하시며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날 회장님께서 살아생전 고향에 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10년이 채 되지 않아 현실이 됐고 금강산 관광 유람선이 동해와 장전을 오갔으니 새삼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 천 년을 사실 것 같이 늘 건강하시던 분께서 갑자기 소천하셨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듯 온 국민은 엎드려 통곡하며 슬퍼했습니다. 정 회장님은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새마을 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열사의 나라에서 지구 끝 오지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대한민국의 위대한 힘과 용맹을 앞장서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술의 현대, 세계의 현대를 주창하시며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신 위대한 선각자이십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그 자리가 더욱 크고 깊어 보이는 오늘, 세상은 현대 정주영 회장님, 삼성 이병철 회장님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 근대사의 세 영웅이라고 흠모하며 못내 그리워합니다.

전경배(시인·전 성균회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