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로고


통합 검색 입력
전체
사설
시평
시론
포럼
오후여담
[살며 생각하며]

유년의 경험과 잊히지 않는 기억

기사입력 | 2022-07-01 11:14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내가 체험한 어린 시절의 일들
기억 속에서 빛나고 있어 위안

시간 초월해 깊숙이 묻혀 있는
순수한 삶과 일치 ‘존재의 순간’

유년 때의 인상적 경험은 행운
일상에 숨어 있는‘아름다운 詩’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들을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절망할 때가 많다. 물론 이것은 나이테가 쌓이면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라고 체념하지만, 생의 절대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과거의 일들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지적처럼, 기억 속에서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는 것은 프리즘처럼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까마득히 먼 유년 시절의 경험들이 어른이 된 후 내 삶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몇몇 아름다운 일들과 함께 기억 속에 별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적이 위안을 찾는다. 샤를 보들레르가 ‘악의 꽃’에서, ‘향수의 눈물로 가려진’ 과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오! 당신은 지나간 옛날엔 나의 누이나 아내였지요’라고 사랑을 고백한 것도 이와 유사한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년의 기억에 대한 이러한 현상학은 나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신비스러운 심리적 현실이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빛바랜 사진 속의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진외가로 갔던 일이 잊히지 않고 때때로 산책길에서 조용히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때의 경험이 너무나 깊고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타는 듯이 뜨거운 태양 아래 할머니와 나는 아침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끝없는 하얀 80리 길을 걷고 또 걸어야 했다. 할머니의 흰 모시 저고리는 땀으로 흠뻑 젖었고 나의 고무신도 질벅거렸다.

이윽고 해질녘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유유히 흐르는 넓은 강가에서 세수를 하고 유림의 종가(宗家), 기와집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들어가 진외갓집을 찾는 행복한 기쁨을 가졌다. 우리가 찾은 할머니 친정집은 위엄이 있었지만 시간과 비바람에 퇴락한 고가(古家)였다. 그러나 매미들의 시끄러운 울음 속에 뜨거운 그 먼 길을 오직 옛집을 찾아가기 위해 쉬지 않고 걸었던 일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져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것뿐이 아니다.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비탈진 산길을 오르내리며 보았던 자연 풍경이 그 어느 것보다 내 마음속에 어둠 속의 판화처럼 또 다른 기억으로 아직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학교가 파하면 교문을 나서 능금나무 과수원 길을 지나 굽이쳐 흐르는 푸른 강을 징검다리 밟고 건너 국도를 벗어나 집으로 가는 좁은 길 10리는 어린 나에게 언제나 멀기만 했다. 하지만 장날이 되면 나는 차일을 친 책전 앞에 널려 있는 책들을 살펴보며 넋을 잃은 듯 서 있다가 날이 저물어 어둠 속에 그 무서운 산길을 달려가야만 했다.

그것은 무엇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 ‘과거에 대한 스케치’에서, 유년 시절의 인상적인 경험의 순간들이 성인되어 가졌던 흐릿한 일상적인 경험의 순간들과는 달리 강열한 자각과 인식을 주기 때문에 생을 보다 선명하게 보이게 만들었다고 했다. 여기서 울프 역시 나처럼 성인이 되어 가졌던 경험보다 어린 시절에 보고 느꼈던 아름다운 풍경을 시적인 산문으로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울프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작은 해변 도시 세인트아이브스(St. Ives)로 여행했다고 말한다. 그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어머니 치마에서 검은색 바탕에 자줏빛 아네모네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게 ‘최초의 기억’이라고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다른 기억을 이야기한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머물렀던 바닷가 그 유아원에서 잠결에 들었던 파도 소리, 창문에 드리워진 노란 블라인드 뒤에서 해변으로 밀려와 되풀이해서 철석이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 그리고 바람에 움직이는 블라인드 소리를 감각적으로 느낄 만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울프는 그때 보았던 어둠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 그리고 잠자리에서 들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순순한 환희라고 말한다.

이렇게 울프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이러한 아름다운 경험들이 ‘최초의 기억’으로 지워지지 않고 조용히 빛을 발하는 것은, 아무런 느낌도 없는 일상적인 삶, 즉 ‘비존재(non-existence)’ 속에 시간을 초월해서 깊숙이 묻혀 있는 순수한 삶과 일치된 ‘존재의 순간들(moments of being)’이 프루스트가 말한 ‘무의식적인 기억’에서처럼 회상의 표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니콜 우르콰트 교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존재의 순간들’은 그것들을 경험한 사람에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상적인 삶의 휘장 뒤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순수한 삶의’ 패턴을 드러낸다. 그래서 일상적인 삶의 휘장이 찢어질 때, 우리가 어떤 순간을 완전한 의식으로 경험할 때, 사람들은 삶의 진수(眞髓)를 강렬하게 경험한다. 이러한 ‘존재의 순간들’은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 사소한 일상적인 삶 가운데 숨어 있는 ‘짧은 시’로 읽힐 수 있다.

내가 경험한 유년 시절의 일들이 어른이 되어 경험한 다른 어떤 일상적인 일들보다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 계속 빛나는 것은, 완전한 의식을 통해 ‘비존재’인 일상적 삶의 불투명한 장막 뒤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아름다운 삶의 근원적 무늬를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많이 본 기사 Top5

핫클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