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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논단]

기상 슈퍼컴 5호기와 치열한 ‘초읽기’

기사입력 | 2021-11-19 11:21

박광석 기상청장

“지구는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같은 날씨를 반복하지 않았다.” 고미숙 작가는 저서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인간 앞에 주어진 전인미답의 운명을 날씨에 빗댄 것인데, 그 ‘무한한 확률’의 영역을 이보다 더 잘 담아낸 문구를 필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실제로 지구는 탄생 이래 지난 46억 년간 단 하루도 같은 날을 반복한 적이 없다.

이와 닮은꼴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바둑이다. 마찬가지로 5000년에 이르는 바둑 대국의 역사 속에서도 ‘똑같은 한 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바둑이 만드는 경우의 수는 자연의 날씨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네덜란드 컴퓨터 과학자 존 트롬프는 바둑의 착수 경우의 수를 계산했는데, 약 2.08×10¹⁷²라는 천문학적 값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 바둑의 세계에서만큼은 인간의 직감과 본능적 사유를 뛰어넘을 또 다른 존재의 등장은 감히 허용될 수 없었다. 적어도 2016년 이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구글의 인공지능(AI)인 ‘알파고’가 등장하면서 인류가 그어 놓은 금단의 영역은 무너지기에 이른다. 알파고가 그해 3월 세계 바둑계보 1인자인 이세돌 9단을 4 대 1로 꺾은 것이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알파고의 승리는, 애플리케이션(딥러닝), 빅데이터(16만 개의 기보와 100만 건의 대국),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빛의 속도로 처리하는 슈퍼컴퓨터의 연산능력에 있었다.

또한 비슷하게도, 일찍이 기상청은 이러한 알파고의 학습능력과 유사한 방식을 현업 예보에 적용해 왔다. 알파고 식 표현을 빌리자면, 빅데이터(기상관측 자료)를 애플리케이션(수치예보 모델)의 입력 자료로 사용해 슈퍼컴퓨터로 계산한 결과가 일기예보의 토대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바둑에서 제한된 ‘초읽기의 시간’ 안에 상대의 수를 읽어내듯, 정해진 시간 안에 초당 5경(京·1조의 1만 배) 번의 연산을 순식간에 처리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일기예보는 알파고의 바둑과 닮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 ‘계산기’ 역할을 하는 슈퍼컴퓨터의 임무는 막중하다. 기상청은 지난 8월부터 ‘두루’ ‘마루’ ‘그루’ 3개의 시스템으로 구성된 슈퍼컴퓨터 5호기를 새로 도입해 가동하고 있다. 이번에 도입된 5호기의 계산 속도는 이전 4호기의 8배 정도나 빠르다. 1초에 무려 5경1000조 번을 계산한다. 5호기의 빠른 연산능력은 기후변화 시나리오 등 정부의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 판단의 과학적 근거 자료를 지원하고, AI 기법을 활용한 기상예측 기술 개발 등 기존의 4호기로는 불가능했던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슈퍼컴퓨터 5호기의 탄생은 지난 도쿄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육상 선수 마르셀 제이컵스를 떠올리게 한다. 100m를 9.8초 안에 달린 그 속도감에서도 사뭇 닮았지만, 이전에 세워진 세계 신기록을 뛰어넘기 위해 새로 배출된 신예 중 하나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이 새로운 ‘인간 탄환’을 배출해 냈듯이, 끝없는 기술 발전에 대한 염원이 광속의 두루와 마루, 그루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에 기상청의 노력이 더해져, 비약적 성능 향상을 이룬 슈퍼컴퓨터 5호기가 알파고를 뛰어넘는 활약상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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