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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나무가 써 준 네 편의 시

기사입력 | 2021-11-12 11:32

김용택 시인

마을 앞 키 큰 느티나무 두 그루
일흔네 해 지나다니며 지켜보니

내가 걸음마 할 때도 찾아가고
동네 사람들은 함께 웃고 놀고

늘 시를 쓰고 노래도 하는 나무
아픔·사랑·행복의 소리 들려줘


내가 사는 작은 강변 마을이 나의 서재다. 나무들이 나의 책이다. 작은 논과 밭,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배추와 무와 쪽파와 겨울을 지낼 마늘이 내 책이다.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데, 어? 어제하고는 다른 바람이다. 바람 속에 추위가 들어 있다. 놀랍다. 이렇게나 다른 바람이 불다니, 강으로 걸어나갔다. 마을 앞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에서 단풍 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바람에 날린다. 낙엽 속에는 바람 소리가 섞여 있다. 강변 마른 풀들이 넘어지고 일어선다. 겨울이 왔다. 봄부터 나와 지내던 귀뚜라미도, 꾀꼬리도, 파랑새도, 소쩍새도 날아갔다. 이제 나는 앞산 참나무에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겨울을 지내야 한다.

사실, 바람은 소리가 없다. 나무도 소리가 없다. 바람이 나무를, 나무가 바람을 만나야 소리가 난다. 역사도, 현실을 만나야 소리친다. 소리는 현실이니까. 아픔이든 슬픔이든 절망이든 행복이든 사랑과 이별이든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현실’은 일일이 ‘소리’를 낸다.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로 태어나 느티나무로 살다가 느티나무로 죽는다. 나는 아직 다 살고 죽은 느티나무를 보지 못했다. 출신과 신분, 계급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문제다. 나무는 정부다. 봄이 오면 나무는 정의로운 새 정부를 조각한다. 나무는 늘 새로운 시를 쓰고, 새 역사를 쓰고, 새 노래를 부른다. 마을 앞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나는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 밑을 일흔네 해 동안 지나다니고 있다. 눈만 뜨면 그 느티나무는 내 앞에 서 있다. 이 느티나무 밑으로 온 동네 사람이 모여 놀던 여름날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내가 걸음마를 배웠을 때 아버지는 벌거벗은 나를 데리고 나무 아래로 사람들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 발 또 한 발 걸을 때/ 오래 밟은 흙이 발가락을 덮고,/ 나는 마른 흙 범벅이 된 지렁이를 보았네./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내려다보고 서 있을 때/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며/ 내 손을 끌어당겼어./ 아가, 더 자랐구나./ 강 건너 나무들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 느티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며 웃었어./ 저놈 봐!/ 저놈이 웃네./ 모든 오늘이 느티나무 아래로/ 모여들어 나를 보며 함께 웃었어./ 그늘이 환하게 웃어주던/ 그 좋은 시절, 우리 아버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때 그 웃음이 나와/ 나는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지금도 웃어.’

- 미발표 졸시 <그늘이 환하게 웃던 날> 전문

‘나는 나무입니다./ 나는 정면이 없어요./ 바라보는 쪽이 정면이랍니다./ 나는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달라 보여요./ 나는 경계가 없어서/ 모든 것들이 넘나듭니다./ 바람이 오면/ 바람 부는 나무가 됩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나무가 되고/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나무가 되고/ 새가 날아가면/ 새가 날아간 나무가 되고/ 달이 뜨면/ 달이 뜨는 나무가 됩니다./ 달이 나무 위에 떠 있는 그 시간,/ 입맞춤의 긴 시간을 나는 좋아했답니다./ 나는 시인의 집 앞에 서 있습니다./ 나비가 강을 건너오네요./ 나는 설레요./ 나는 기다려요./ 당신을.’

- 미발표 졸시 <나무가 써 준 시를 받아 적다> 전문

내가 근무하던 초등학교 교실 창가에 아름드리 미루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봄이 와서 연두색 새 이파리가 돋아나고 서서히 잎이 커지고 살이 오르면서 나뭇잎들은 바람을 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바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나뭇잎이 다 자라 서로 부딪쳐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미끈하게 빠진 미루나무의 온몸이 아침 햇살 속에 드러나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이할 때, 그 눈부시고 찬란하던 몸서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과 나무 밑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곤 했다.

‘바람 부는 나무 아래 서서/ 오래오래 나무를 올려다봅니다./ 반짝이는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그러면,/ 당신은 언제나 오나요.’

- 졸시 <그러면> 전문

내가 사는 마을 앞 강 건너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봄이 와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서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와도 미루나무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부도 하지 않고, 이사도 가지 않고, 여행도 다니지 않고 미루나무는 그 자리에서 몇십 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해 큰 바람이 불어왔을 때 미루나무는 자기가 살아온 길이만큼 길게 넘어졌다.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여름이었어/ 나, 그 나무 아래 누워 강물 소리를 멀리 들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가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서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강물에 눈이 오고 있었어/ 강물은 깊어졌어/ 한없이 깊어졌어//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다시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지/ 그냥,/ 있었어.’

- 졸시 <나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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