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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고 자라고 갈아입고 견디며… 오늘도 기다립니다, 그대가 오기만을

박경일 기자 | 2021-11-01 11:05



■ 놓쳐서는 안될 한국의 사계 12選

즐거움을 주는 여행이 있는가 하면
슬픔을 위로하는 여행도 있습니다.
휴식이 되는 여행이 있는가 하면,
다짐을 생각하며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오래된 추억을 찾아 도시 뒷골목으로도 갑니다.
여행이 이렇듯 다양한데,
어떻게 여행지에다 순위를 매겨 줄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문화일보가 다녀온 곳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곳,
계절에 맞춰 3개씩 추렸습니다.

글·사진 = 박경일 전임기자

1. 벚꽃 뺨치는 순백의 목련 - 경북 경주 유적지

여행은 때로는 ‘발견’이다. 거기 사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쳤던 것을, 타자인 여행자는 발견한다. 경주의 목련이 꼭 그랬다.

목련은 봄꽃 중에서 뒷전이다. 봄을 알리는 속도에서는 매화에 밀리고, 벚꽃에는 화려함으로 밀린다. 화사함으로는 개나리에, 강렬하기로는 진달래나 철쭉에 어림도 없다. 하지만 벚꽃보다 더 화려한 경주의 목련이 얼마나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뜨리는지는 경주 불국사에 가보면 알 수 있다.

불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봄꽃은 대웅전 뒤편 무설전의 회랑을 지나 당도하는 관음전에 숨겨져 있다. 해마다 봄이면 관음전 주변에 목련꽃으로 꽃 사태가 난다. 관음전 담장에 기대서서 절집을 내려다보면 불국사의 법당 처마를 배경으로 나무마다 가지가 휘어질 듯 피어난 큼지막한 목련이 하늘을 다 가린 모습을 만날 수 있다.


2. 복사꽃 필 무렵 최고산책로 - 전북 무주 잠두길

벚꽃 질 무렵을 전후한 일주일 정도, 그러니까 봄이 막 절정의 고갯마루를 넘고 난 뒤가 이곳에 가야 할 때다. 전북 무주군 무주읍 용포리 잠두마을. 마을 강 건너편, 산자락에 바짝 붙어 지나는 오솔길이 있다. 이 길에 발을 들이면 저절로 걷게 된다.

청량한 신록과 물빛 사이로 새소리와 꽃향기까지 겹쳐지고, 흙길의 감촉까지 더해지니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다. 이 길이야말로 아스팔트 도로가 훌쩍 지나쳐버리는 깊숙한 곳들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보여준다. 벚나무에 꽃잎이 날릴 때면 복사꽃과 조팝나무 꽃이 피어나고 숲은 신록으로 물들기 시작하는데, 그즈음 이 길은 봄을 즐기는 ‘최고의 산책로’다.

훌륭한 풍경을 보면 소중한 이를 데려오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 강변 길이야말로 길 가다 마주친 낯선 이들까지도 손목을 잡아끌고픈 그런 길이다.


3. 안개 휘감긴 몽환의 들판 - 전남 함평 불갑산

전남 함평 불갑산 연실봉 능선에 서면 말 그대로 ‘몽환의 풍경’과 만날 수 있다. 봄이면 함평의 너른 들판은 새벽마다 온통 안개로 휘감긴다. 낮은 안개가 깔린 함평의 너른 들판 뒤로는 첩첩이 이어진 산자락의 그림자가 수묵화처럼 번지면서 정취를 보탠다. 막 떠오른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안개가 마을과 들판 위로 번져가는 모습이 어찌나 회화적이던지.

이뿐인가. 불갑산 서쪽 산허리를 감아 도는 임도 위에서는 활엽수들이 만들어내는 신록의 바다를 만난다. U자형의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불갑산의 신록은 그 질감이며 채도가 으뜸이다.

임도 끝에다 차를 세워두고 터덜터덜 그 길을 걷는 두 시간쯤의 시간 내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면 그때의 감동이 혹 짐작이 될까. ‘사람 사는 마을’이 빚어내는 봄날의 풍경이 이렇듯 아름답다.


4. 산자락 보며 종일 걷는다 - 강원 정선 운탄고도

강원 정선의 화절령 능선에서 시작해서 백운산, 질운산의 어깨를 짚고 새비재(조비치·鳥飛峙)로 넘어가는 길을 찾아 ‘운탄고도(運炭高道)’라는 이름을 처음 달아줬다. 중국의 ‘차마고도(茶馬古道)’에서 따서 붙인 이름이다.

진짜 차마고도의 규모와 시간의 깊이에 감히 견줄 수는 없겠지만, 운탄고도도 해발 1200m를 넘나들면서 25㎞가 넘게 이어진다. 걷는 길 내내 한쪽으로는 우람하게 몸집을 키운 자작나무며 참나무, 소나무들이 원시림을 이루고 있고, 건너편에는 태백의 준령들이 파도처럼 일어선다. 민가 하나 보이지 않고 온통 초록으로 가득한 산자락들을 보면서 종일토록 걷는 길이다.

부드러운 내리막길에 몸을 맡기고 이런 길을 따라가면 걷는 일이 목적지에 가닿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걷는 순간’ 자체를 즐기는 것임을 알게 된다.


5. 고무신 할머니들의 순례길 - 강원 인제 봉정암

해발 1244m의 내설악 깊은 곳에 숨겨진 암자 봉정암으로 가는 길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길 중에서 감히 ‘순례’라 이름 붙여 마땅한 길이다. 백담사를 출발해 봉정암까지 왕복 22㎞ 산길을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온 힘을 다해 오른다.

더 놀라웠던 건 할머니들이 비교적 순한 수렴동 길을 마다하고 몇 배나 더 힘든 오세암 길을 택해 암자를 향해 오른다는 것이었다. 등산화도 등산복도 없이…. 믿기 힘들겠지만 고무신을 신은 허리 굽은 할머니도 있었다. 깊은 산중 암자를 찾아드는 이유는 오로지 자식을 위한 기도 때문이었다.

제 몸으로 고행을 감수하며 공덕을 쌓아 자식들에게 바치려는 숭고한 걸음. 봉정암 스님에게서 ‘17년 동안 700번 봉정암을 오른 할머니’ 얘기를 들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700번째 등정은 ‘아들이 업고 올라왔다’고 했다.


6. 미슐랭별점 받은 유일한 길 - 경북 안동 35번 국도

경북 안동에서 봉화를 넘어 강원 태백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는, 여행가이드북 미슐랭 그린가이드 한국편이 별점을 매긴 유일한 길이다. 내로라하는 명소인 내설악의 백담사나 속초의 낙산사, 경주의 안압지, 부산의 해운대 등도 받지 못한 별점을, 이 소박한 길이 받았다.

미슐랭가이드가 한국의 길에 매긴 유일한 별점이니, 35번 국도를 미슐랭가이드가 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35번 국도는 오래된 고택의 맑은 정신을 지나고, 누추해서 더 따스한 마을을 건너가고, 그윽한 천변과 낙동강의 물소리를 지나고, 뫼 산(山)자로 우뚝 솟은 청량산도 지난다.

미처 다 세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이 길이 가장 빼어난 시간은 초여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구릉의 밭에 감자꽃이 다 지기 전쯤이다.


7. 핏빛 단풍으로 물든 계곡 - 광주 풍암정

가을이 깊어지면 광주 무등산 원효 계곡의 정자 풍암정으로 드는 길은 온통 핏빛 단풍으로 물든다. 풍암정. ‘단풍(풍·楓)’과 ‘바위(암·巖)’로 이름을 삼은 이 정자의 주인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든 김덕보. 김덕보는 임진왜란 와중에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 김덕령의 동생이다.

두 해 전 큰형 덕홍을 금산전투에서 잃고, 작은 형 덕령을 땅에 묻은 덕보는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6년을 은둔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풍암정을 세웠다. 풍암정 주위 기암괴석 사이에서 자라는 100그루가 넘는 단풍나무가 시냇물마저 붉게 물들였다고 했다. 지금의 단풍은 그때 풍암정의 경관을 기억하는 이들이 심은 것이다.

풍암정의 김덕보를 기억하기 위해, 형 덕령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오래전에 일부러 심어둔 것들. 그래서 풍암정 단풍은 각혈 같은 비장한 단풍이다.


8. 금강산·해금강 손에 닿을 듯 - 강원 고성 717OP

강원 고성 민북 지역에 있는 남한 땅 최북단의 전방 관측소가 717OP다. 숫자를 군대식으로 읽으면 ‘칠일칠’이 아니라 ‘칠 하나 칠’이다.

717OP는 고성 통일전망대보다 한참 더 북쪽에 있다. 미확인 지뢰지대 철조망 너머 그야말로 북녘땅이 코에 닿을 만한 자리다. 거기서 보는 금강산과 해금강 일대 경관이 워낙 빼어나서 ‘금강산전망대’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전망대에서 북쪽을 향해 서면 구선봉과 해금강,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깃든 감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대기가 청명한 초가을날의 경관이 가장 좋다.

금단의 공간이었던 717OP는 2019년 5월 조성된 걷기 길인 ‘DMZ 평화의 길’에 포함돼 하루 160명씩 관람객을 받았으나, 아프리카돼지열병에다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문을 걸어 잠근 지 2년이 넘었다.


9. 지리산서 가장 화려한 단풍 - 전남 구례 피아골

지리산의 가장 화려한 단풍이 ‘피아골’에 있다. 정통 피아골계곡 트레킹 코스는 ‘직전마을 → 표고막터 → 삼홍소 → 구계폭포 → 피아골대피소 → 하산은 역순 → 직전마을’로 원점 회귀한다.

거리는 약 9.1㎞. 왕복 4시간 남짓이다. 꼬박 이틀을 걸어야 하는 종주 등반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삼홍소 이후부터는 등산과 진배없어 초보자들에게는 힘겨운 코스다. 지리산 단풍을 목적으로 간다면 직전마을에서 삼홍소까지만 다녀와도 좋다.

평지나 다름없는 오솔길 1㎞에, 순한 등산 코스와 비슷한 숲길 1.2㎞. 편도 1시간, 왕복 2시간의 가벼운 걸음으로 지리산 최고의 단풍을 보고 올 수 있다. 직전마을로 드는 길에서 사찰 연곡사에 들러 동승탑과 북승탑은 꼭 보자. 정교하게 돌을 조각해낸 1000년 전의 솜씨가 생생하게 남아있다.


10. 화려한 눈꽃 구경의 명소 - 강원 정선 만항재

강원 정선에서 태백을 거쳐 영월 쪽으로 내려서는 고개 만항재. 그곳에서 현기증 나는 설경과 맞닥뜨릴 수 있다.

만항재 고갯마루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들이 피고 진다. 겨울 아닌 다른 계절에도 만항재에 가볼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만항재의 겨울을 첫손으로 꼽은 건 겨우내 피어나는 화려한 눈꽃 때문이지만,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겨울 여행지 사이에서 존재감이 압도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이 쏟아지면 설경 여행은 엄두를 내기 쉽잖은데 만항재 눈 구경은 더없이 편안하다. 워낙 눈이 잦은 곳이라 즉시 제설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고개 정상 휴게소에 차를 세워둔 채 설경을 즐겨도 좋겠고, 매점에서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숲을 바라봐도 좋다. 순백의 눈으로 치장된 낙엽송 사이로 눈을 딛고 걸어볼 수도 있다.


11. 합쳐 3700살 세 그루 古木 - 강원 정선 두위봉

강원 정선 두위봉(1446m)의 구분 능선 가파른 비탈에는 10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주목 세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아래에서부터 순서대로 1100살, 1400살, 1200살이다.

세 그루 중 가운데에서 자라는, 가장 오래된 나무가 산 시간이 1400년이다. 합계 나이 3700살.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니 주목이 죽어서도 ‘천 년’ 더 남는다면, 이 세 그루의 나무는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건너가고 있는 것인가. 두위봉의 주목은 나무에 깃든 시간으로, 또 거대한 위용으로 그 앞에 선 사람을 ‘압도’한다.

코로나의 우울로 가득한 신년 벽두에 ‘위로’를 생각하며 두위봉의 주목 앞에 섰다. 첩첩한 시간이 쌓인 노거수 앞에서 느끼는 건 ‘세상사의 하찮음’ 같은 것들이다.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일’이란 게 얼마나 티끌 같은가.


12. 뜨거운 노동의 한겨울 바다 - 전남 장흥 매생이 채취

깊은 겨울의 한복판. 전남 장흥의 새벽 바다는 차가운 바다에 시린 손을 담그고 매생이를 건져 내는 고된 노동으로 뜨거웠다.

바다에 대나무를 꽂아 놓고 거기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만든 발을 널어 두고는 매생이를 길러내는데, 그해 겨울 내저마을 주민이 손으로 꽂은 굵은 대나무 지주가 무려 1만1000개, 거기다 넣은 매생이 발이 1만 개이라고 했다. 매생이 발을 넣는 일은, 그러나 매생이를 거두는 일에 대면 거저먹기다.

매생이 수확이 얼마나 고된지는 도회지 사람들은 짐작도 못 하리라. 지주대 사이에 배를 띄우고는 배 위에 엎드려서 찬 바닷물에 손을 넣어 매생이를 훑어 낸다. 물때에 맞춰 수확해야 하니 잠조차 편히 잘 수 없다. 고된 노동의 현장이지만 매생이 양식장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고된 노동이 그려내는 뜨거운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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