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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덕수궁 석조전의 비화

기사입력 | 2021-10-29 11:33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 前 국립중앙박물관장

기와집·초가집 일색인 한성서
서양식 건축물 색다른 근사함

질서·균형 강조 로마건축 양식
신전과 같은 고고함·위엄 갖춰

1910년 대한제국 꿈 담아 완공
일본에 병합되는 얄궂은 운명


덕수궁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초등학교 학생들의 미술대회가 자주 열렸고, 겨울에는 작은 연못에서 스케이트도 탈 수 있었다. 한옥이 즐비한 가운데 이질적인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은 색다른 근사함으로 기억됐다. 석조전에는 국립박물관이 있었는데, 안쪽 로비에는 커다란 철 불상이 있었고 그 엄숙한 분위기에 마음을 가다듬게 됐다. 철불 앞의 접시에 돈이 놓였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오랫동안 기와집이나 초가집이 주였던 한성(서울)에 서양식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이후로, 조선이 서구의 여러 국가와 협약을 맺으면서였다. 덕수궁이 위치한 정동은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 됐고, 정동구락부는 외교관과 조선 관료들이 어울리는 사적 외교의 중심이 됐다. 이때 건립된 영사관, 교회, 학교 건물들은 주로 유럽과 미국의 기술자들에 의해 지어졌다.

널리 알려진 대로, 덕수궁은 원래 1897년부터 정궁으로 쓰였던 경운궁(慶運宮)을 1907년 고종의 궁호가 덕수(德壽)로 정해지면서 새로 붙여진 명칭이다. 덕수궁 안에 대한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건립한 석조전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할 궁궐이었다. 석조전은 탁지부 고문이었던 영국인 존 매클리비 브라운이 발의하고 당시 상하이에서 활약하던 역시 영국의 건축가 존 하딩이 설계해 1910년 준공됐다.

고전주의적 비례와 좌우대칭의 형식으로 건립된 석조전의 중앙 박공에는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오얏꽃 패턴을 조각하고 발코니를 곁들였으며, 이오니아 주식(柱式)을 사용했다. 접견실과 홀의 실내도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고전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지하 1층은 부엌과 시중들의 주거 공간, 1층에는 접견실과 홀, 2층에는 황제와 황후의 침실이 들어섰다. 황제의 침소와 업무 공간을 같은 공간에 둔 것은 과거의 궁궐과 다른 점이었다. 고종이 이러한 양풍의 건축물을 허락한 것은 근대국가 건설을 지향한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서양 근대의 신고전주의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은 늘 고대 로마였다. 로마제국은 오래전 멸망했지만, 개인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시민의 도덕의식과 철학은 후대 국가의 모범이 됐다. 로마제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보는 시각은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열렬히 수용됐는데 이 시기가 바로 신고전주의 시대였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도 로마 시대에 확립된 시민의 자유,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을 강조하면서, 루이 왕조의 봉건적인 사회 조직과 풍습의 타락을 비판했다.

로마인의 이상인 질서·균형·화음은 건축에서 단순하고 조화를 이루는 기하학적 조형미로 반영됐는데,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은 19세기 유럽의 교회와 박물관 건물에 적용돼 마치 신전과 같은 고고함과 위엄, 안정감을 줬다. 곧, 고전주의 건축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유행해 국제적인 경향을 띠게 됐고, 19세기 말에는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독립전쟁 후 로마를 이상적 국가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로마공화정의 정치·사회 제도뿐 아니라 상징을 많이 수용했다. 의회의사당을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이름을 따 ‘캐피톨 힐’이라고 하고, 로마의 원로원 세나투스처럼 상원을 ‘세네트’로 칭했으며, 로마제국의 상징이었던 독수리를 국가의 새로 정했다. 워싱턴DC의 의회의사당뿐 아니라 대부분의 주(州)청사 건물들도 대체로 고전주의 건축 양식이 적용됐다.

유럽에서 20세기 들어 고전주의 양식이 매우 다른 개념으로 부활한 곳은 1930년대 나치 독일이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독재자들이 흔히 갖는 욕구는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의 건설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히틀러는 그의 말을 증명해 보였다. 정권을 잡자 히틀러는 자신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건축가로 내세우면서 베를린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새롭게 재탄생시키려는 야심을 품었고, 이것은 거의 그의 집념이 됐다. 그는 고대 로마의 독수리를 나치 독일의 상징으로 삼았고, 어떤 학자들은 나치 군인들이 앞으로 손을 똑바로 올려 인사하는 방식 역시 로마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고전의 미적 가치는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모든 건축물을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를린을 남북을 주축으로 하는 십자형과 커다란 동심원을 결합한 형태로 만들고, 한쪽 끝에는 300m 높이의 거대한 돔을, 반대쪽에는 고전적 양식의 기차역을, 그 중심에 120m의 개선문을 세워 세계의 수도로 만드는 장대하고 웅장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계획은 독일의 패전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고종이 꿈꾸던 대한제국도 석조전이 완공된 1910년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고종이 1919년 승하하기까지 거주했던 석조전에서는 그 후 1933년부터 일본 근대미술이 전시됐고, 해방 이후 1945년에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1953년에 국립박물관이 됐다가, 2014년에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원형 복원돼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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