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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내 생애의 어느 가을날

기사입력 | 2021-10-15 11:25

김용택 시인

봄 강물 물들였던 푸른 보리밭
여름 강변서 잠을 자던 사람들

가을 운동회 펄럭이던 만국기
겨울 언 강서 썰매타던 아이들

우리 시대에 사라져간 풍경들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것일 뿐


앞산에 밭들이 오래전에 사라졌다. 사람들이 앞산 비탈진 산밭에다 보리를 갈고 콩·팥을 심고 밭 가에 감나무 심고 밭 부근 산에 밤나무를 심어 가꾸어 돈을 만들었다. 보리갈이가 끝나면, 감을 따서 방 가득 쌓아 놓고 밤을 새워 감을 깎던 감빛 같은 붉은 얼굴들이 사라졌다.

봄이 오면 밭에 자라는 보리들이 파랗게 강물을 물들였다. 자갈이 많은 비탈진 산밭에 흙의 유실을 막고 큰돈이 되는 닥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닥 껍질은 큰돈이 되었다. 밭이 사라지니, 땡볕 속에 한 줄로 서서 비탈진 산밭을 타고 오르며 콩을 심던 어머니들의 활달한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내가 좋아하던 배추흰나비가 날아다니던 푸른 보리밭이 사라졌다.

비탈진 앞산을 오르내리며 나무를 하던 나무꾼들이 사라졌다. 지게를 지고 굽이굽이 비탈진 산길을 훌훌 뛰어 내려오던 나무꾼들이 언젠가 사라져 버렸다. 스무 명도 더 넘는 사람이 저마다 지게에 나무를 한 짐씩 짊어지고 산길을 따라 뛰어 내려오던 그 건강하고 힘차던 율동은 피가 도는 굵은 핏줄 같았다. 산을 다 내려온 나무꾼들이 강가에 나뭇짐 지게를 세워 놓고, 징검다리에 엎드려 강물을 들이켜고 윗옷을 벗어 나뭇짐 위에 걸쳐두고 흐르는 시린 강물을 퍼서 세수하던 모습이 사라졌다.

지게와 작대기와 낫을 갈던 숫돌이 사라졌다. 꼴을 베어 담던 망태가 사라지고, 벼와 보리를 널어 말리던 네모 반듯한 덕석과 고추를 말리던 둥근 맷방석이 사라졌다. 붉은 고추, 호박 쪼가리, 털어 말린 들깨, 논두렁에 심어 가꾼 붉은 팥이 함께 널린 둥근 맷방석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고, 한 편의 서정시였다. 밭이 사라지고 나무꾼들이 사라지니, 눈이 내리면 하얗게 드러나던 산으로 가는 실낱같던 길들이 막혀 버렸다. 훌훌 뛰어 산을 오르던 노루며 고라니가 사라지고 깡충깡충 눈밭을 뛰어 달아나던 토끼들이 사라져 버렸다.

휘영청 달이 밝은 늦가을 밤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깊은 산속 논에 있는 볏단을 짊어지고 산길을 따라 내려오던 노동의 장엄함이 사라졌다. 강을 건너다니던 징검다리가 사라졌다. 징검다리에서 채소를 씻고 빨래를 하던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 명절이 돌아오면 마을 남자들이 넓은 징검다리를 차지하고 돼지를 잡던 풍경도 사라졌다. 강변에 소들이 사라졌다. 봄 여름 가을까지 강변에 매여 있던 누런 황소들이 사라졌다. 해 지면 소고삐를 잡고 집을 향해 바삐 걷는 황소 뒤를 따르던 아이들이 사라졌다. 쟁기질하는 소리가 사라졌다.

느티나무 밑에 모여 앉아 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여름이면 강변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강물에서 목욕하던 어린아이들이 사라지고, 언 강에서 썰매를 타던 아이들도 사라졌다. 연을 날리던 아이들이 사라지고, 정원 대보름 풍물놀이를 하던 농악꾼들이 사라졌다. 학교를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다 사라졌다. 초가지붕이 사라지고, 마을 돌담이 다 사라지고, 굴뚝이 사라졌다. 논에 모내기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논에서 벼를 베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하늘 높은 가을이면 초등학교 운동장에 펄럭이던 만국기가 사라지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함성이 사라졌다. 그 우렁찬 응원 소리가 울려 퍼지던 어느 가을날은 우리들의 마음을 빈틈없이 꽉 채우던 눈물겨운 축제의 하루였다.

닭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보리 타작하고, 콩 타작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집집이 키우던 돼지들이 사라졌다. 집에서 키우던 토끼며 온 마당을 헤집고 다니던 닭들이, 닭을 키우던 닭장이 사라졌다. 불을 때어서 소죽을 끓이던 커다란 가마솥이 사라졌다. 소 외양간이 사라지고, 쟁기가 사라지고, 삼베를 짜는 베틀 소리가 사라졌다. 콩을 볶아 먹던 날이 사라지고, 제비가 사라지고, 느티나무 아래 그네가 사라지고, 팽이가 사라지고, 썰매가 사라졌다.

마을마다 곳곳에 집들이 사라지고, 타작 마당이 사라지고, 불을 때는 부엌이 사라졌다. 방바닥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던 앉은뱅이 밥상이 사라지고, 떡을 해 먹던 시루가 사라졌다. 설과 추석만 남고 많은 명절이 사라졌다. 물고기 중에 새우, 조개, 미꾸리, 가물치들이 사라졌다. 물고기들이 사라지니 물고기를 잡는 여러 방법이 사라졌다. 비 오는 늦가을 빈 논에서 가재 잡기가 사라졌다. 겨울 처마 끝에 숨은 참새들이 사라졌다. 닭서리, 수박 서리, 곶감 서리들이 사라졌다.

가을걷이 농사일이 다 끝나고 부슬부슬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누군가가 마을 공동 샘을 퍼 손가락만 한 누런 미꾸라지를 잡았다. 샘물을 품으면 샘물 나오는 물구멍에서 미꾸라지들이 꾸역꾸역 물을 따라 샘 바닥으로 기어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샘가로 모여들어 여기도 한 마리 저기도 한 마리, 미꾸라지를 가리키며 웅성거리던 모습은 한가하고 가을의 끝을 알리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아쉽다는 말이 아니다. 다시 돌아가자는 말도, 그때가 좋았다는 말도 아니다. 그런 날들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그때 그 마을에서 평생을 고스란히 살고 있다. 내 생애에 있었던, 그런 풍경들과 일들이 생각나는 그런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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