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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건널목이자 성장의 트로피…‘다리’에 깃든 사연을 건너다

박경일 기자 | 2021-10-14 10:02

노량해협을 건너가는 남해대교와 노량대교의 야경. 앞쪽의 다리가 48년 전에 놓인 국내 최초의 현수교이자 건립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던 남해대교이고, 뒤쪽의 다리가 2018년 완공된 노량대교다. 노량대교와 삼천포대교, 창선교가 건설되면서 잇따라 남해대교의 통행량이 급감하자 남해군은 남해대교를 공원화하고 주탑 상부를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해서 전망대, 해상카페, 경관 폭포, 집라인 등을 갖춘 교량 테마관광지로 꾸밀 예정이다. 노량해협을 건너가는 남해대교와 노량대교의 야경. 앞쪽의 다리가 48년 전에 놓인 국내 최초의 현수교이자 건립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던 남해대교이고, 뒤쪽의 다리가 2018년 완공된 노량대교다. 노량대교와 삼천포대교, 창선교가 건설되면서 잇따라 남해대교의 통행량이 급감하자 남해군은 남해대교를 공원화하고 주탑 상부를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해서 전망대, 해상카페, 경관 폭포, 집라인 등을 갖춘 교량 테마관광지로 꾸밀 예정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남도 연륙교에 담긴 ‘그때 그 시절’

- 남해대교
설립 당시 ‘아시아 최장 현수교’
대한민국 경제 압축발전의 징표
한려해상 중심… 70년대 명소로

- 진도대교
여수 돌산대교와 동시공사 진행
24시간 작업…국내 첫 사장교로
울돌목 물살위 스카이워크 ‘후들’

- 거제·완도대교
박정희 대통령때 개통 몇번 연기
볼록한 아치형… 하늘로 이어진듯
완도교, 한강철교 부품으로 지어


남해·진도=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여행이 살피는 대상은 다양합니다. 공간과 시간을 아우르는 거의 모든 사물이 여행의 대상입니다. 여행은 풍경을 지나가고, 역사를 가로지르고 지형과 지질, 기후와 풍토를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여행자의 시선에는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담깁니다. 여행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복합적인 풍경은, 단언컨대 ‘건축’이라는 생각입니다. 여행에 웬 건축. 이렇게 반문한다면 유럽 여행을 떠올려 보시지요. 우리가 거기서 오래 보았던 건 종교와 역사였지만, 그걸 담아낸 그릇은 성당과 광장, 즉 건축이었습니다. 기념비적인 건축물은 미감을 드러내고 시대를 증언하며, 추억을 환기합니다. 해외여행을 하며 감탄하는 건물 대부분은 공공건축입니다. 공공건축에는 그 사회의 지향과 가치, 그리고 미감이 고스란히 담기는 까닭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기념비적인 공공건축물이 있을까요. 그러다 떠올린 게 ‘다리’였습니다. 그냥 다리가 아니라 바다를 가로질러 육지와 섬을 잇는, 한때 경제성장의 기적이자 상전벽해의 감격으로 장식됐던 연륙교 이야기입니다. 압축성장의 시기에 지어진 여러 곳의 연륙교를 찾아가 지금의 모습과 그때의 이야기를 담아왔습니다. 바다를 건너는 다리가 그것만으로도 귀한 구경거리이기도 했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의 사연과 추억이 다리 하나하나마다 깃들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혹여 남도로 향하는 여정에서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면, 그때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 다리. 경제성장의 트로피로 서다

정유재란 최후의 격전지.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 곳이 노량 앞바다다. 그 바다를 사이에 놓고 마주 보고 있는 마을이 모두 노량리(露梁里)다. 하동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 설천면 노량리. 두 마을 사이에 좁은 통로 모양의 바다 목인 노량해협이 있다. 노량해협은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바친 비장한 승전이 있었던 곳이니, 해전의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두 마을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노량의 이름으로 그 정신을 잇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73년 6월 22일 개통한 남해대교는 하동 노량리와 남해 노량리를 잇는다. 역사상 남해대교만큼 인기를 누렸던 다리가 또 있었을까. 세계에서 7번째로 길다는 인천대교도 개통 당시 그 웅장한 위용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남해대교가 누린 인기에 대면 어림도 없다.

남해대교는 압축성장 시기의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징표였다. 붉은 주탑의 현수교인 남해대교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상징했다. 현대 포니 승용차의 CF 배경이 여기 남해대교였으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수영복 사진도 남해대교에서 찍었다. 한국관광을 알리는 관광홍보물의 첫 번째 사진은 늘 남해대교였다. 교과서 표지에도, 아이들의 책받침이나 필통에도 남해대교 사진이 새겨졌다.

남해대교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라는 본래의 의미보다는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상징이자 이른바 ‘관광 한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활용됐다.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것의 대명사였고, 자랑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경제성장의 트로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해대교는 전장 660m로 ‘아시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으니 자랑할 만했다. 그해 11월 14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와 기타큐슈(北九州)를 잇는 칸몬(關門)대교(1068m)가 들어서면서 남해대교가 ‘아시아 최장 현수교’ 타이틀을 보유한 기간은 불과 6개월이 채 안 됐지만 말이다.


# 노량바다에 청구권자금으로 다리건설

1905년이 돼서야 고작 전장 9m의 현대적 교량을 가설했을 정도로 보잘것없었던 우리 교량 역사에, 동양 최대 현수교 건설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이런 감회와 자긍심이야말로 남해대교 인기의 밑받침이었다. 하지만 남해대교 건설 과정과 당시의 사정을 찬찬히 뜯어보면 남해대교 건설은, 마냥 자랑스러워할 일만은 아니었다.

남해대교는 우리 땅에 놓은 다리지만, 자본과 기술 대부분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다리 건설에는 한일협정 과정에서 식민지 피해보상으로 받은 청구권자금이 대거 투입됐다. 철제 주탑과 케이블 등 주요 자재가 모두 현물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이었다. 주탑을 칠한 붉은색 페인트까지도 일본에서 들여왔다. 부자재는 전범 기업인 신닛폰(新日本)제철을 비롯해 이토추(伊藤忠)상사, 이시카와지마하리마(石川島播磨)중공업에서 수입했다. 250t급 해상 기중기와 예인선 등 공사에 필요한 설비도 대부분 일본 것을 빌려다 썼다. 우리 것이라고는 시멘트와 보조 철강재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런 질문은, 그래서 나온다.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은 노량해협을 건너는 남해대교를, 전범 기업의 자재와 식민지 피해보상 청구권 자금으로 지었어야 했을까.

모든 인프라 건설에 정치적 논리가 개입되듯 남해대교 건설 이면에도 정치가 있었다. 남해대교를 처음 국비 사업에 반영할 당시 남해 지역구 국회의원은 이승만 정부 초대공보실장을 지낸 5선 경력의 최치환 의원. 국회 건설분과위원장이었던 그는 갖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해대교 건설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1971년 선거를 앞두고 공천에서 떨어지면서 대신 공천을 받아 전국 최다득표율로 당선된 신동관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남해대교 준공 테이프를 끊었다. 그때 남해 사람들은 이를 빗대 남해대교를 ‘최치환 눈물다리, 박 대통령 허락다리, 신동관의 자랑다리, 처녀 총각 연애다리’라고 했다. 5선 경력의 최 의원은 김무성 전 미래통합당 의원의 장인이다. 남해대교 건설이 과연 누구의 공적이었는가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남해사람들 사이에서는 논란거리다.


# 최고의 관광지가 된 다리

남해대교 개통식은 축제로 치러졌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환영인파들과 함께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것이었다. 개통식 날 남해대교에는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운임 15원짜리 통통배를 타고 육지로 건너가야 했던 남해 사람들은 다리를 걸어서 건너면서 얼마나 감회가 깊었을까. 개통식 사진을 보면 남해대교 위가 마치 마라톤대회 출발점을 방불케 한다. 한꺼번에 몰린 인파로 다리가 흔들리는 바람에 경찰이 다리 양쪽 끝을 통제하고 구경꾼들을 돌려보내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남해사람들에게 남해대교가 감회였다면 구경꾼들을 사로잡은 건 현수교의 미감이었다. 주탑을 양쪽에 세우고 굵은 케이블을 매달아 양쪽 육지에 고정한 뒤 다리를 이 케이블에 매다는 방식을 그동안에는 적교(吊橋)나 서스펜션 브리지 등으로 불렀는데, 남해대교 개통을 계기로 토목학회에서 ‘현수교’로 명칭을 통일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에다 놓은 현수교는 주변의 경관과 썩 잘 어울렸다.

개통 직후부터 남해대교는 일약 유명 관광지가 됐다. 바다에 걸린 다리가 그 자체로 이름난 여행 목적지가 된 것이었다. 남해대교는 한려수도를 찾은 신혼여행객들의 필수 목적지였고, 까까머리 중고생의 단골 수학여행지이기도 했다. 관광객이 몰려들자 다리 위에는 유명 행락지에나 있는 ‘사진사’까지 등장했다. ‘남해대교 앞에서 사진 한 장’은 관광객들의 필수코스였으니 장사가 잘됐다. 너도나도 카메라를 메고 나오는 통에 문화공보실에서 ‘경남도 관광 사진협회’를 조직해 인원을 규제했다. 얼마나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았던지 한창때는 노량우체국이 사진사들의 사진발송을 위해 밤 10시까지 문을 열어두었을 정도라고 했다.

남해대교 입구에는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임시버스정류장이 있다. 컨테이너 뒤쪽 남해대교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이 사진사에게 돈을 주고 사진을 ‘박았던’ 자리다. 거의 반세기가 다 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었을까. 그렇게 찍은 그때의 기념사진이 남해 쪽 남해대교 입구의 ‘남해각’에 전시돼 있다.

남해각은 해태관광주식회사가 남해대교 완공 이듬해인 1974년 추석 명절에 개관한 숙박시설이자 휴게공간. 당시 해태관광은 판문점에 임진각을 지어 운영하는 등 관광 관련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남해각은 개관 당시 호텔과 음식점, 나이트클럽까지 갖춘 관광명소였다. 쇠락을 거듭해 모텔로 전락했다가 재생작업을 거쳐 지난 5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남해각에서는 ‘남해각, 일상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남해대교가 건너온 역사의 자취를 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남해대교를 방문했던 이들의 오래된 사진과 사연이 제법 볼 만하다.

뜻밖이었던 건, 외지 사람들이 경제성장의 성과나 한려수도의 미감으로 기억하는 남해대교를, 정작 남해사람들은 ‘고향 집 대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해 사람들은 귀향길에 남해대교의 붉은색 주탑을 보면 ‘이제 집에 다 왔다’고 안도하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남해사람들에게 붉은색 주탑은 곧 고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994년 남해대교 주탑을 녹을 방지하는 방청효과가 좋은 회색으로 덧칠했다가 ‘붉은색이라야 남해대교’라는 민원이 쏟아져 2003년 다시 붉은색으로 되돌리기도 했다.


# 울돌목 물살 위에 다리를 놓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울돌목의 바다 위에 진도 섬으로 건너가는 진도대교가 있다. 진도대교와 여수 돌산대교는 형제나 다름없다. 두 다리는 1980년 12월 26일, 동시에 공사를 시작했다. 진도대교와 돌산대교는 모두 사장교다. 사장교는 양쪽 땅에 주탑을 세우고 비스듬하게 친 강철케이블로 다리 상판을 매단 다리. 어느 한쪽이 먼저 완공한다면 대한민국 최초의 사장교 타이틀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진도대교와 돌산대교가 그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다.

공사는 같은 날 시작됐지만, 애초부터 경쟁은 진도대교가 유리했다. 바다에 교각을 세워야 하는 돌산대교보다 땅에다 교각을 세우는 진도대교가 공법의 난도가 낮아 공기 단축에 유리했다. 여기다가 진도대교는 24시간 작업을 강행했다. 그 결과 진도대교는 애초의 준공예정일을 100일 앞당겨 완공됐다. 진도대교 개통식은 1984년 10월 18일. 돌산대교는 이보다 두 달쯤 늦은 12월에 완공됐으니 진도대교가 형이고, 돌산대교가 아우인 셈이다.

진도대교의 이른 완공은, 우리의 설계와 시공능력을 불신했던 세계은행을 머쓱하게 했다. 당시 정부는 진도대교와 돌산대교 건설을 위해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받았다. 돌산대교의 차관은 문제가 없었는데, 진도대교는 차관 승인이 보류됐다. ‘한국의 건설사가 이런 다리를 지을 기술력이 없다’는 게 세계은행 측이 내세운 승인 보류의 이유였다. 실제로 진도대교는 1970년 계획됐다가 이듬해 연말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긴 설득이 있은 뒤에야 가까스로 진도대교 차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예정보다 100일 앞선 진도대교 완공은, 차관 승인을 주저하던 세계은행에 말 그대로 본때를 보여준 셈이었다.

2005년에는 진도대교 옆에 똑같이 생긴 제2 진도대교를 놓았다. 같은 모양의 다리를 포개듯이 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쌍둥이 다리다.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다른 곳 하나는 있듯이 ‘쌍둥이 다리’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데가 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같다. 답은 하나는 통으로 된 교각이고, 다른 하나는 H자형의 교각이라는 것이다.

진도대교가 건너가는 명량 바다에는 지난달 케이블카가 들어섰다. 이제 다리가 아니라도 울돌목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케이블카는 해남 우수영관광단지에서 진도의 녹진 전망대까지 바다 위 1㎞쯤의 거리를 초속 5m의 속도로 날아간다. 케이블카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가 95m 남짓. 그쯤에서 울돌목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색다르다.

진도대교 해남 쪽 아래에는 스카이워크가 있다.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가까이서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해상 보도교다. 급류를 방불케 하는 거센 물살을 보면 무섬증이 절로 생긴다. 투명한 바닥 아래로 우우 소리를 내며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보고 있노라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 한강 인도교를 뜯어다 지은 완도교

육지와 섬을 잇는 기념비적인 다리 중에는 거제대교와 완도대교도 있다. 통영 용남면 장평리와 거제 사등면 덕호리를 잇는 거제대교는 1971년 완공됐다. 공사는 그해 2월 28일에 끝났는데도, 개통은 미뤄졌다. 개통 날까지 받아두었다가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그해 4월 27일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때문이었다. 거제대교 개통을 미룬 건 ‘선거 직전에 개통하려는 속셈’이었다. 섬에다 다리를 놓은 것 자체가 집권세력의 치적이었고, 그게 표로 이어졌다. 그때 선거에서 박 대통령은 53.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선거 이후 대통령 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참여하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전환돼 16년간 대통령 직접 선거가 이뤄지지 않았다.

거제 주민들은 거제대교를 ‘개나리 다리’라고 했다. 다리가 건너는 바다는 견내량(見乃梁)인데, ‘견내량 다리’가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다가 ‘개나리 다리’가 된 것이었다. 개통 당시만 해도 섬을 드나드는 차량과 걸어서 건너는 주민들로 거제대교는 늘 붐볐는데, 조선소 건설로 인구와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통행인구가 늘어나자 1999년에 거제대교 옆에다 신거제대교를 놓았다. 지금은 거제를 드나드는 대부분의 차량이 신거제대교로 건너다니는 바람에, 옛 다리는 한적하다. 거제대교는 가운데가 살짝 볼록한 아치형이어서 한쪽 끝에서 다리를 보면 마치 하늘로 이어진 길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완도대교 이야기다. 지금 해남에서 완도로 건너가는 ‘완도대교’는 과거 ‘신(新)완도대교’였다. 철거된 ‘완도교’가 있었을 때의 얘기다. 1969년 준공된 완도교가 있었을 때는, 2012년에 놓인 다리를 ‘새(新) 다리’로 구분해 불러야 했다. 해남에서 완도까지는 작은 섬인 달도를 징검다리처럼 딛고 건너간다. 먼저 해남의 남창리에서 바다 건너 달도까지 다리가 놓였다. 1965년 세워진 ‘남창교’다. 그리고 4년 뒤인 1969년에 달도에서 완도 원동리로 넘어가는 다리인 완도교가 놓였다.

완도교는 철제 트러스교였다. 한강철교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그랬을까.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완도교에는 여러 가지 얘기가 전해진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부서진 한강철교의 트러스 구조물 일부를 가져와서 지었다는 얘기도 있고, 폭격 맞은 임진강 철교의 자재를 한강 인도교를 놓을 때 사용했다가 그걸 다시 완도교 지을 때 썼다는 얘기도 있다. 새 다리가 놓인 2012년 아쉽게도 완도교는 철거돼 사라졌다. 주민들은 군외면 원동선착장 남쪽에 철거한 완도교에서 뜯어낸 트러스가 야적돼 있다고 했다. 붉게 녹슬어가는 철제구조물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보존이라기보다는 방치에 가까웠다. 오래되고 늙은것들에 대한 세상의 대접이었다.


■ 남해대교 마지막 사진사 박용길씨

“그땐 남해로 신혼여행 많이와
관광가이드 역할도 같이 했죠”


“그때 사진사는 사진 기술보다는 말솜씨가 좋아야 했어요. 관광안내판 하나 변변히 없던 시절이라, 사진사가 관광 가이드 역할을 겸했지요.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준 뒤에 수고료를 받는 식으로 사진을 찍어줬던 거지요. 흑백사진은 200원, 컬러사진은 500원을 받았는데, 사진사들이 돈을 모아 말을 한 마리 사서는 말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 500원을 더 받기도 했지요. 그때는 남해대교로 신혼 여행을 오는 부부들이 많았어요. 신혼부부는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해서 가격이 부담되니까 ‘필름 한 통에 얼마’ 이렇게 흥정한 뒤 사진을 찍어 인화하지 않고 필름째 건네줬지요.”


■ 前 완도군의원 최병진씨

“‘걸어 건너면 다리병 안걸린다’
소문 나자 주민들 몰려 북새통”


“해남에서 완도 사이에 작은 섬 달도가 있어요. 가운데 달도가 있으니 다리가 두 개예요. 먼저 해남 남창에서 달도를 잇는 남창교가 있고, 달도에서 완도로 건너오는 완도교가 있지요. 남창에서 달도로 건너가는 남창교 개통식에 박정희 정권의 내각 수반이던 송요찬 전 육군참모총장이 방문했어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재야운동가 함석헌 씨도 참석했지요. 그때가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한일회담 반대로 감옥을 가기도 했던 함 씨가 한복을 입은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해요. 달도에서 완도를 잇는 완도교가 놓인 날에는 ‘걸어서 다리를 건너면 다리 병이 안 걸린다’는 소문이 돌아 완도 주민들이 다들 다리로 나왔지요.”

해남과 완도 사이의 바다를 건너가는 완도대교. 완도대교 바로 옆에는 1969년 한강 인도교 트러스를 뜯어다 지었다는 옛 다리 완도교가 있었다. 2012년 완도대교가 지어지면서 완도교는 철거됐다.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돌목의 거친 바다를 건너가는 진도대교. 기술력을 의심한 세계은행이 정부가 다리건설을 위해 신청한 차관의 승인마저 거부했을 정도였는데, 진도대교는 예정된 기한보다 100일 앞서 완공됐다. 남해대교 마지막 사진사 박용길씨 前 완도군의원 최병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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