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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윤석열의 소명

기사입력 | 2021-02-22 11:41

이현종 논설위원

대통령 몰래 인사 발표 下剋上
親文 민정수석도 못 참고 사표
與 권력 농단 실세 세력 있나

사법부·검찰 뿌리째 흔들려
법치 파괴된 자리에 獨裁 자라
5개월 남은 尹총장 응답해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 이젠 주술(呪術)이 됐다. 지금 문 정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정말 이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따름이다. 지난 주말 동아일보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문 대통령 재가 없이 검사장 인사를 발표했고, 문 대통령은 사후 승인했다고 한다. 신현수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이런 하극상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문 대통령에게 박 장관의 감찰을 건의했지만 묵살당한 뒤 청와대에서 자신의 역할이 더는 없다고 판단해 사표를 거듭 제출했다는 것이다. 평소 온화한 성품인 신 수석은 지인에게 문자를 보내 “박 장관과는 더는 볼일이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문 정권판 국정농단 사건’이다.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잡은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이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인사와 국정 운영을 하던 때와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검찰 인사를 대통령의 사전 재가도 없이 감히 발표할 수 있고 대통령은 마지못해 사후 승인해주는 ‘간 큰 세력’이 있다는 것인데 그 실체가 궁금하다. 나아가 주로 피의자·피고인 신분인 여당 의원들이 앞장서서 돌연 검찰이 올 초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6대 범죄에 대해서만 수사권을 갖고 있는데, 이것마저 빼앗는 입법을 추진 중이다. 중대범죄수사청을 만들어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뺏어오고 법무장관이 통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권력 비리 수사를 막고 검찰 해체를 노리는 ‘입법 쿠데타’나 다름없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 등 현대 독재자들이 하는 사법 장악과 똑같은 일을 검찰 해체를 지향하는 여당 내 ‘탈레반’ 그룹이 주도하고 친문들이 뒷받침하는 형국이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 수장인 김명수 대법원장은 존경은커녕 ‘거짓말쟁이’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창피함을 모른다.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책무인 판사의 최고 수장이 자신의 입으로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시인해 놓고도 9개월 전 ‘기억력 탓’을 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군부 엘리트 모임인 ‘하나회’ 같은 사법부 내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들이 온갖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있다. 양식 있는 판사들은 여지없이 쫓겨나가고, 정권 비리 사건을 심리하는 ‘코드 판사’는 3년 만에 다른 법원으로 전출 가야 하는 인사원칙도 무시하고 4∼6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혼돈을 종식시키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국민은 야당이 견제와 균형을 잡아줄 것으로 기대해 보지만 절대 열세인 의석구조나 인물면에서 기대난망이다. 여권의 법치 파괴에 맞서 징계·감찰·수사 등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결단이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 총장은 취임사에서 “헌법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국민의 말씀을 경청하며 국민의 사정을 살피고 국민의 생각에 공감하는 국민과 함께하는 자세로 법 집행에 임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현 정권이 그렇게 윤 총장 찍어내기에 혈안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평범한 검찰총장으로 퇴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추미애 전 법무장관은 징계, 수사지휘권 등으로 그의 정치적 맷집을 키웠고, 후임인 박범계 장관도 추 전 장관 못지않게 윤 총장의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윤 총장이 인기를 얻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저 공직자로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고 어느 정권이건 빌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기가 5개월 남은 윤 총장은 막스 베버의 말처럼 ‘소명(召命)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고 있다. 법치가 무너지면 독재가 자라는데 이를 지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소명이 있고, 이에 윤 총장이 응답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운명(運命)’ 때문에 정치를 시작했지만, 윤 총장에겐 운명보다 더 중요한 소명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검사와 정치의 영역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머리를 빌릴 수는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처럼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열정과 책임감, 균형적 판단력을 갖추고 있느냐가 기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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