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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시각]

남인순과 ‘여성운동 시체’

장재선 기자 | 2021-01-21 11:29

장재선 문화부 선임기자

지난 2004년 ‘여성 100인 국회 보내기’ 캠페인이 있었다. 참신한 여성리더를 발굴해 정당에 공천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가 이끈 이 캠페인에 추천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30대 남성 기자가 위원으로 초대된 까닭은 몰랐으나, 기성 정치를 ‘맑게’ 하겠다는 취지가 좋아서 작업을 힘껏 도왔다. 추천위원 중 시민운동 명망가였던 박원순 변호사도 있었다.

그때 실무를 총괄했던 이가 남인순 의원, 당시 남윤인순이라는 이름을 썼던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 사무총장이었다. 뒤에 여성연합 대표를 맡았던 그가 비례대표로 의원 배지를 달았을 때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정계로 가려고 그 디딤돌을 놨던 것인가.

그런 마음을 접은 것은, 남녀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그가 기여할 거라는 기대가 있어서였다. 이름에 부모 성을 함께 넣을 정도로 여성인권 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허망한 착각이었다. 정치인 남인순은 성폭력 피해 여성을 2차 가해에 시달리게 해 놓고도 모르쇠로 뻗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고소사건과 관련, 그가 가해자인 박 시장 측에 피소 사실을 사전에 알려준 것이 검찰 수사 결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나도는데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라고 발뺌했다. 스스로 불미스러운 인간임을 드러낸 것이다. 여성계 몫으로 여당 최고위원이 된 자라면, 피해자 대리인에게 먼저 연락해서 사실을 확인하고 피해 여성 보호책을 논의해야 했다. 박원순처럼 여성주의를 내세운 사람도 위력으로 여성 직원에게 성추행을 자행하는 모순을 직시해야 했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동료 의원들과의 단톡방 대화에서 피해자 호칭을 ‘피해 호소인’으로 하는 게 맞는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가해자와의 정치적 인연과 진영 보호에 몰두한 것이다.

피해자와 그 어머니, 아버지, 동생이 각각 쓴 입장문이 18일 공개됐다. 남 의원 언행으로 인해 진실이 가려진 상황에 대해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은 박 전 시장 열성지지자들로부터 끔찍한 위협을 받으며 “다 같이 죽자”라고 했다가 “살아서 진실을 밝히자”며 서로 붙들고 운다고 했다. 피눈물이 흐르는 그 글들을 읽으며 남 의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성연합은 언젠가부터 정계 진출 회전문으로 불린다. 이 정부에서도 당·정 곳곳에 이 단체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은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은 정치진영 이익에 복무했다. ‘여성단체 막내 활동가’가 여성연합 건물 현관에 붙인 대자보를 보면, 정치권과 결탁한 지도부 실상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평생 여성운동을 하고 싶다는 이 활동가는 이렇게 탄식했다. “당신들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당신들의 2차 가해로 인한 상처와 죽어버린 여성운동의 시체뿐이다.”

그 통절함에 공감한다. 그러나 정치꾼 운동가들의 정신이 시체가 됐을 뿐 여성운동 전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여성운동을 출세의 끈으로 삼는 선배들에 대해 분노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그 시체를 넘어 새 길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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